뤼첸 전투 (163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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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가장 큰 손실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이었다. 스웨덴 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도 왕의 죽음은 치명적인 상실이었다. 스웨덴에서는 급히 독일에서 본국으로 귀환한 [[악셀 옥센셰르나]]가 젊은 [[크리스티나]]를 여왕으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섭정이 되어 그녀를 보좌했다. 옥센셰르나는 하이르브론 동맹을 결성하여 개신교 진영의 결속을 굳히는 것과 더불어 프랑스에 원조를 요청하여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사망 후 군대의 유지에 안간힘을 다했다. 군대의 지휘는 [[작센-바이마르 공작 베른하르트]]와 [[구스타브 호른]]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주군를주군을 잃어버린 군의 사기는 오르지 못하고, 황제군에 대해 열세에 있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후 [[뇌르틀링겐 전투 (1634년)|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를 겪으면서 스웨덴은 완전히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하이르브론 동맹은 스웨덴의 강대화를 원하지 않던 프랑스의 용인으로 인해 처음부터 위기를 겪었다. 열세를 만회하려던 스웨덴의 목표는 프랑스와 작센공의 접근으로 인해 파기되었다.
 
발렌슈타인은 이 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전사시켰으나, 그로 인해 자신의 입장도 곤란해지게 되었다. 원래 발렌슈타인이 황제군 사령관으로 복귀한것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라는 강적에게 대항할 만한 장군이 자신밖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 구스타브가 죽은 이상, 발렌슈타인의 존재 가치는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최종적으로 발렌슈타인은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 의해 [[1634년]]에 암살당했으니, 이 전투에서 구스타브가 전사한것이 그 원인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뤼첸 전투는 스웨덴에게 크나큰 충격과 영향을 남겼으나, 전투에서는 승리한 점, 또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남긴 유산으로 인해 스웨덴의 강대국 시대([[발트 제국]])을 확립시킨 점은 중요한 결과로 남게 된다. 그 후 교착 상태에 빠진 30년 전쟁에 구교국가인 프랑스가 프로테스탄트측에 참전하고, 구교측에서는 신성로마제국 대신 스페인이 참전하면서 30년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