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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칼린'''(Kolleen Park, 한국명: '''박영미''', [[1967년]] [[5월 1일]] ~ )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예술 감독]]·교수이다. 연극배우, 보컬 트레이닝 전문가, 음대 교수, 음악 전문 감독, 뮤지컬 연출 등 공연계에서 많은 직업을 거쳐왔다. [[미국]]에서 유학중이던 아버지 '박근실'과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 '아이렌' 사이에서 태어나<ref name="who_is">{{뉴스 인용|저자=황인혜|출판사=TV 리포트|제목='남격' 이경규 쥐락펴락한 '마녀' 박칼린은 누구?|url=http://news.tvreport.co.kr/main.php?cmd=news/news_view&idx=54471|작성일자=2010-07-12|확인일자=2010.7.22}}</ref> 내내 한국 부산직할시(현재 [[부산광역시]])에서 살면서 한국 전통 문화를 습득했고 한국 무용과 피아노로 음악 예술을 시작했으나 9살에 다시 미국으로 가미국으로가 첼로를 배우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경남여고 2년을 다니느라 부산에서 생활했다. 다시 미국 캘리포니아 종합예술대학에 진학해 첼로를 전공했으나 1991년 돌연 국악을 배우려 입국. 서울대학교 국악 대학원에 입학하여 명창 [[박동진]]에게 발탁되어 판소리를 사사했다. 이후 부산 시립극단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1995년 창작뮤지컬 《명성황후》로 대한민국 음악감독 1호가 되었다. 2002년 《오페라의 유령》, 2004년 《노트르담의 곱추》, 2006년 《아이다》, 2009년~2010년 《시카고》 등등 70편이 넘는 작품을 선보이고 2010년에는 KBS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에 출연하여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였다. 현재 소속사는 킥 뮤지컬 스튜디오이며 [[호원대학교|호원대학교 뮤지컬과]] 겸임교수을 거쳐 [[동아방송예술대학|동아방송예술대학 공연예술계열 뮤지컬전공]] 전임교수로 재직했으다재직했다.<ref>[http://cafe.naver.com/kyyk/339 예술감독 박칼린(네이버 카페 킥 뮤지컬 스튜디오)]</ref>. 현재는 [[한국예술원|KAC한국예술원]] 뮤지컬학부 학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2012년 12월, 제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산하 청년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 생애 ==
 
=== 대학 시절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하였는데 대학 재학 중에는 [[1989년]]에 [[대한민국]]의 [[MBC 대학가요제]]에서 《사막의 비》라는 곡으로 참가하여 본선 진출 입상을 한 바 있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한민국]]으로 다시 귀국하여 1991년 [[서울대학교]] 국악과 대학원에 입학했다.<ref>[http://www.mystarnews.com/mystar/index.html?no=423649 무릎팍 도사' 박칼린 "외국 국적 때문에 고 박동진 명창 전수자 못 돼"] 마이스타뉴스 2011년 4월</ref> 7~8살때 부산에서 한국무용을 배우면서 음악에 대한 친밀감이 있었고 국악의 멜로디에 이끌려 국악과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때 무형문화제로 지정되어 판소리를 하던 명창 [[박동진]]에게 선택되어 사사했다. 대학원에서 국악과를 다니고 있을 때 하와이에서 열린 명창·명인들의 공연이 있었을 때 박칼린은 무용선생님의 조수로 따라갔다. 당시 박동진을 모시지도 않았었고 같이 몇번 식사한 정도도로정도로 서로에 대해 아는것이아는 것이 거의 없었으나 마지막날 식사자리에서 박동진이 박칼린에게 "넌 소리를 해야겠다"고 하며 수업료도 받지 않고 박칼린을 가르쳐줬다. 박동진은 박칼린을 인간문화재 후계자인 전수자로 삼고싶어해삼고 싶어해 직접 문화재청에 가서 문의했더니 "한국의 문화재를 등록해 매년 지원금도 나오는데 외국인에게 해줄수는 없다"는 답변을 듣고 무산되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9&aid=0002168552 박칼린, "故 박동진 선생의 인정만으로도 행복했다"] OSEN 2011년 4월</ref>
 
=== 뮤지컬과의 인연 ===
박칼린은 미국에서 어렸을때부터 뮤지컬을 접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다닐 때 연주자와 배우로 뮤지컬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엔 뮤지컬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박칼린이 부산에서 연극을 시작해 그게 인연이 되어 서울로 진출해 정극에서 활동하려던 찰나에 뮤지컬 《명성황후》팀에서 음악감독 제의가 들어왔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해 1995년에 관객에게 선보인 《명성황후》는 배우도, 시설도 준비되어 있지 않던 황무지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13&aid=0000072113 박칼린 "음악감독 데뷔 후 '나댄다' 선입견에 미움받아"] TV리포트 2011년 4월</ref> 박칼린은 1995년부터 1997년 미국 뉴욕 공연까지 《명성황후》에 참여했다. 일부 제작진들은 외국 출신이던 박칼린에게 불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던중그러던 중 어느 사건으로 인해 박칼린이 인정받는 계기가 왔다. 《명성황후》대본과 기본작곡은 되어 있었는데 편곡은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상태였다. 20대 초반이었던 박칼린은 호주로 달려가 피아니스트 둘이 피아노 앞에서 녹음기 하나 켜놓고 백지상태였던백지 상태였던 모든 음향효과와 배경음악 등을 말로 표현하면서 밤새 만들어갔다. 모든 편곡이 완성되고 CD가 완성되어 이를 들고 한국에 오자마자 연습실로 달려가 음반을 들려줬다. 배우와 제작진 30~40명이 모두 앉아 박칼린이 만들어온 것에 주목했다. 주요 장면들의 배경과 조명, 음악들을 목소리로 묘사하고 모든 배역의 노래를 다 부르면서 2시간 넘게 공연을 혼자 재연하자 제작진들의 기립박수가 이어졌다.<ref name="무릎팍"/> 이렇게 만들어진 뮤지컬 《명성황후》는 1997년 한국 창작뮤지컬 최초로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했고 2011년까지 1000회 이상의 공연을 기록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2972935 뮤지컬 '명성황후' 14년 1000회 대기록] 뉴시스 2009년 11월</ref>
 
=== 남자의 자격 출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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