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윤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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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 [[1482년]] [[8월 29일]] ([[음력 8월 16일]]))는 [[조선]]의 제9대 왕 [[조선 성종|성종]]의 계비이며 둘째부인이다. 성종과의 슬하에 두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장남은 조선 10대 왕 [[조선 연산군|연산군]]이고 둘째 아들은 조졸하였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에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王妃)로 책봉되었으나 남편 용안에 상처를 내어 폐비(廢妃)당했다. 그러나 [[연산군]] 즉위후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왕비(王妃)의 작호가 추존되었다.남편'''[[조선 성종|성종]]'''이 사랑했던 여인이다.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ref>조선왕조실록에는 둘 모두 쓰였으나, 윤기무라는 이름이 비교적 적게 등장하므로 {{출처|윤기견의 오기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 작가 [[신봉승]]은 자신이 집필한 드라마 《[[한명회 (드라마)|한명회]]》의 제94회에서, 윤기무는 윤기견의 아우로 슬하에 자식이 없었음이 함안 윤씨의 세보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고, 이를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ref> 와 장흥부부인 신씨(長興府夫人 申氏)의 딸로 [[윤관]]의 11대손이다. 본관은 [[함안파평 윤씨|함안파평]](咸安坡平)이다.
 
남편인 [[조선 성종|성종]]의 후궁들 문제로 시어머니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고부갈등으로 유명하며,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낸 일로 인해 폐비(廢妃)된 후 사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