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마민족 정복왕조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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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지 왜인전』에는 야마타이국(邪馬台国)에 「소나 말이 없다」고 기술했고(실제로도 야요이 시대에 일본에 소나 말이 존재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고분 시대 전기에도 말이나 소는 소수에 불과했을 것으로 보이며, 고분 시대 후기(5세기, 6세기)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다수의 말 사육이 이루어졌다. 말의 껴묻거리 매장이나 말을 닮은 하니와(埴輪)가 발견되기도 하는 등, 이는 말만 대륙에서 온 게 아니라 기마 문화와 그 생활에 익숙한 민족의 수반이 행해졌다고 상정할 수밖에 볼 수 없다.
[[파일:Kondagobyoyama Kofun air.jpg|270px|섬네일|오른쪽|오진 천황의 능묘로 알려진 무덤곤다비뵤야마 고분(誉田御廟山古墳).]]
# 고분 시대 전기(4세기 중엽까지)의 고분은 나무나 돌로 만든 관을 수혈식(竪穴式) 석실에 안치하고 껴묻거리도 구리거울, 청동검 같은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었는데, 위지 왜인전의 왜와 유사한 야요이 시대 이전의 것이다. 이에 비해 고분 시대 후기(4세기 말부터) 고분은 [[오진 천황|오진]](應神)・[[닌토쿠 천황|닌토쿠]](仁徳) 능묘로 대표되는 장대한 것으로 변하며 석실은 대륙이나 한반도에서 온 것이 틀림없는 횡혈식(横穴式)으로, 껴묻거리도 무기나 말갖춤 등의 실용품으로 변모하고 있으며 남녀나 말을 형상을 한 하니와가 더해지는 등 장묘 문화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
# 그리고 고분 등의 벽화나 하니와에 묘사되는 복장이나 말갖춤, 무기는 위지 왜인전에서 묘사된 야마타이의 모습(사람은 전신에 얼굴까지 문신을 하고 위에 구멍을 낸 푸른 베를 쓰듯이 입는)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만주 등 대륙의 기마민족에 의해서 초래된 한반도의 그것(하얀 옷에 허리띠를 두르고 말을 다루는)과 같은 모습으로 만주의 기마민족의 호족(胡族)과 완전히 같다.
# 고구려어 가운데 현재 전해지는 단어 일부는 고대 일본어와 유사한 것이 많다.
# 기키(記紀)의 천손강림 설화나 신무동정(神武東征) 신화는 지리적으로도 문헌적으로도 한반도에서부터의 규슈 정복과 기나이 진출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는 단어(예를 들어 쿠시후루의 ‘후루’는 한자어로 ‘마을’을 뜻하고 쿠시후루는 일본서기에는 ‘소호리’로 되어 있어 이는 한반도에서 국가의 중심인 왕도를 말하는 단어이다) 및 스토리(예를 들어 고사기에는 천손강림한 땅은 ‘가라쿠니’ 즉 한반도 남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천신의 고향으로 해석하면 문의가 통하게 된다는 것으로 거북이의 인도로 새로운 땅을 찾아 나라를 세웠다는 신무동정 신화는 고구려 등 한반도의 건국신화 그 자체이다) 상에서 고구려 등 한반도의 개국설화와 일치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 에가미는 실재했던 것으로 알려진 천황 가운데 시호를 「신(神)」 자를 쓰는 스진 천황(崇神天皇)과 오진 천황을 각각 천손강림 및 신무동정의 주인공으로 보았고 스진 천황은 일본서기에는 하시쿠니시라스스메라미코토(御肇国天皇), 고사기에는 하시쿠니라스노미마키노스메라미코토(所知初国之御真木天皇)라 하고 있어, 스진 천황은 미마키(미마 즉 임나, 키 즉 성곽으로 임나의 성이란 뜻)에 거주하고 이곳을 출발점으로 나라를 세우게 된 것으로 보인다.
# 그리고 에가미는, 오진 천황이 기나이에 진출하고 뒤에 야마토 조정이 성립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조정국가(朝廷国家)의 숱한 호족들로는 무라치(連)인 오토모(大伴), 모노노베(物部), 나카토미(中臣) 등과, 지명을 우지로 쓰는 오미(臣)인 가쓰라기(葛城), 고세(巨勢), 소가(蘇我) 등이 이중구조를 보이며 예전에는 하늘 - 천신계 호족과 조정 성립 이전부터 각각의 지방을 지반으로 삼고 있었던 국신 계열의 호족에 대응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는 천손 – 천신계 호족, 천황과의 인족이 되는 많은 국신계 호족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이원성은 대륙의 기마민족의 정복왕조의 큰 특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수나라|]](随) 왕조의 사신 배세청(裴世清)이 야마토 조정에 찾아와 남긴 기록에는 왜국은 알려진 것과 같은 만이족이 아니라 진 왕조(秦王朝), 라고 적고 있다. [[진한]](辰韓)을 포함해 중국에서는 진(辰)을 진(秦)으로 적어 진 왕조(秦王朝) 또는 「진 왕조(辰王朝)」라고 하고 있다. 구당서에는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으로 원래 작은 나라였던 일본이 왜를 병합하였다.」고 하였고, 신당서 일본전에는 진무(神武) 이전의 일본의 통치자가 「축자성(筑紫城)」에 있었고 뒤에 야마토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수나 당은 야마토 조정을 고대 왜(倭) 자체로 본 것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의 진 왕조의 먼 후예로써 야마토 지방을 다스리기 이전에는 지쿠시에 있었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 왜왕 무(武)는 중국 남조의 유송 왕조에 사신을 보내 사지절도독왜신라백제임나가라진한모한칠국제군사사(使持節都督倭・新羅・百済・任那・加羅・秦韓・慕韓七国諸軍事) 안동대장군(安東大将軍)으로 자칭했는데, 그 당시 존재하지도 않던 진한・모한(마한) 과거 삼한의 국명을 더하는 한편, 삼한의 하나였던 변한은 들어있지 않다. 이는 변한은 왜왕이 현실에서 지배하고 있었던 임나 그 자체였기에 더할 필요가 없었고 이를 근거로 왜왕은 과거 삼한을 지배했음을 중국 왕조에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과거에 삼한(진한・마한・변한) 일부를 통합했던 「진왕」이라는 부여계 기마민족으로 생각되는 지배자가 존재했다. 또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당은, 일본은, 진 왕조가 왜를 정복하고 세운 국가로 볼 수 있다.
#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로 본 5세기, [[오진 천황|오진]](応神)의오진의 시대에 왜군은 한반도 깊숙이까지 진출해가며 진 왕조(辰王朝)의 먼 후손을 자처한 백제 왕가를 구원하였다. 이러한 원정을 농경민족이 할 수는 없다. 오키미가(천황가)가 임나를 중심으로 하는 기마민족인 진왕조의 먼 후손이었기 때문에 전란에 가담해 백제 왕가를 돕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 황위계승은 혈통 원리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실상은 그러한 혈통을 보존(에가미는 [[게이타이 천황도천황]]도 혈통이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농경민족에게서 보이는 선양(禅譲)으로 인한 왕조 교체가 없다는 점은 기마민족의 특징으로 일본의 경우 남성 천황과 천황을 잇는 자격으로써 여제(女帝)가 등장하는 고대의 사례도 황위계승 때에 유력자들을 모아 회의를 여는 절차를 포함해, 전쟁 중에 천자가 사망하면 국중대회로 다음 천자를 결정할 때까지 황후가 지휘권을 행사했다는 대륙 기마민족의 왕위계승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헤이안 초기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 실린 1,059개의 우지 가운데 귀화인 계통은 324개로 실제 30%로 다양한 [[도래인]](渡来人)을 받아들인 것을 알 수 있는데 농경민족은 타민족을 야만시하며 천시하는 성향이 강해 외국인의 집단적 이주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대량의 집단 이민을 수용하고 때로는 강제적으로 국내에 이주시키기도 하는 것은 기마민족국가 특유의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 《[[쇼쿠니혼키]](續日本紀)에는 발해 사신이 전한 답서에 으레 고려가 일본을 「族惟兄弟」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에가미는 천황씨와 신라나 임나의 지배층은 동족이라며 같은 천손족으로 칭했다).
# 14세기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의 《진노소토기[[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 「옛날 일본은 삼한과는 동종이라 하였는데 그리 적힌 글들을 [[간무 천황|간무]](桓武)의 대에 불태워 없앴다」고 되어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