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마민족 정복왕조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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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모토 비텐(安本美典)은 「종잡기 어려운 구조를 가진 학설」이라 평했다.
*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는 "완전한 판타지이지 아무런 사실상의 근거는 없다. 에가미 나미오가 창작한 새로운 신화"로, 또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이 일세를 풍미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꼽았다.
# 『민족학 연구』 지면상에 에가미가 처음 기마 민족 정복 왕조설을 말한 좌담회의 기록이 게재된 것은 한국에서 6. 25가 일어나기 전년인 1949년이며[[1949년]]이며, 한반도를 기마민족의 대군이 질풍노도처럼 휩쓸며 남쪽으로 내려오는 이미지는 당시 일본인에게는 눈앞에서 일어나는벌어진 일(북한군의 일부터남침)에서부터 연상하고연상되는 매우 받아들이기 쉬운 이미지였다.
# 일본이라는 정체성이 어디서 기원했는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 메이지 이후의 일본 신화의 합리화합리적인 해석의해석이라는 선을노선을 따랐다.따랐고 기마민족설은 외양적으로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듯이증명하는 듯이 보였다.
# 일본 건국을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처럼 해석하면 서유럽의 역사와 대비하고대비시키며 일본사를 설명할 수 있다. 일본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아시아의 일원이었다는 감각도 종전 후에야 국제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다시패전 출발을뒤에 재기를 꾀하고 있던 일본인의일본인에게 기마민족설은 마음에 들었다.
 
== 현재의 기마민족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