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승 (화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Mersenbot (토론 | 기여)
Namobot (토론 | 기여)
인용 틀 변수 이름 수정
12번째 줄:
| 교육 = 도쿄 미술학교
}}
'''김인승'''(金仁承, <small>일본식 이름:</small> 金城仁承, [[1910년]] [[1월 19일]] ~ [[2001년]] [[6월 20일]])은 [[한국]]의 서양화가로, 호는 지연(智淵), 본관은 [[김해 김씨|김해]]이며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이다.
 
== 생애 ==
김인승은 [[경기도]] [[개성시|개성]]의 지주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는 6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바로 밑의 동생이 조각가 [[김경승]]이다. 김인승과 김경승 형제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김인승이 먼저 [[1932년]] [[도쿄]]로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1937년]] 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부(裸婦)〉로 최고상을 수상했다. 초기의 작품 경향은 데뷔작 《나부》와 같이 사실적인 여성 인물화 위주였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14669&cid=40942&categoryId=33385 두산백과 김인승]</ref>
 
김인승이 작품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은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8년간 전쟁을 치르던 기간이었다. 그 영향으로 그의 인물화에도 정치색이 짙게 깔리게 되었다. 이 기간 중 김인승은 〈간호병〉(1944),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1943) 등 친일 작품들을 남겼다. 수채화인 〈간호병〉은 [[조선식산은행]] 사보인 《회심》(會心)의 속표지화로, 군복 차림의 일본군 간호병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는 친일 미술인 모임인 [[단광회]]에서 집단 제작한 대작이며, 전쟁 지원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대표적인 친일 미술 작품이다.
 
[[1940년]]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 2600년 봉축기념전'에서 입선하였고, 몸은 비록 후방에 있지만 미술로서 전쟁을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열린 시국 전람회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추천 작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김기창 (화가)|김기창]], [[심형구]], [[장우성]] 등이 반도총후미술전의 추천 작가들이다. 그는 이들중 심형구와는 도쿄미술학교 시절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동생 김경승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어용 친일 단체로 당시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인 [[계광순]]이 이사장을 맡은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서양화부 평의원이었고, 김경승은 조각부의 평의원을 맡았다. 이 단체는 다른 분야 친일 예술 단체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로 들어가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는 일도 하였다.
28번째 줄:
|저자=정운현
|제목=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발행일자날짜=1999-07-28
|출판사=개마고원
|출판위치=서울
52번째 줄:
|저자=반민족문제연구소
|제목=친일파 99인 3
|발행일자날짜=1993-04-01
|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