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4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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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는 독재에 저항하던 정치인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되는 [[김대중 납치 사건|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였고, [[1974년]]에는 계속되는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긴급조치]]가 선포되고, [[1975년]]에는 [[고려대학교]]에 군대가 투입되었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제2차 [[유류 파동|석유파동]]으로 인한 경제 위기 등으로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는 높아만 갔다. 박정희는 이러한 움직임을 차단하고자, [[1975년]] [[인민혁명당 사건|인혁당 재건 사건]] 관련자를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하여 8명을 대법원 확정 판결([[2007년]] 재심에서 무죄 확정) 이튿날 사형 집행하는 등 정권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5월 13일]]에는 유신헌법에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긴급조치#긴급조치 9호|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1975년 10월 8일 대한민국 제9대 국회에서 여성 의원 [[김옥선]]은 반 유신헌법 취지 발언을 했고, 이로 인해 의원직 사퇴, 공민권 제한이라는 [[김옥선 파동|파동]]을 일으켰다.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5개월 후 치러진 [[대한민국 10대 총선|제10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집권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 (1967년)|신민당]]에 득표율에서 뒤지는(다른 야당인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민주통일당 (1973)|민주통일당]]까지 더하면 득표율 격차는 8%에 이른다) 등 민심 이반의 조짐이 나타났다.<ref name="김정렴1">[[김정렴]]이 그가 쓴 책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에서 언급. {{뉴스 인용|저자= 이고운 기자 |url=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6/08/23/200608230012.asp |제목= 박정희의 경제정책 18년, 생생한 증언 |작성일자날짜= 2006-8-23 |확인일자=209-5-12}}</ref>
 
[[1979년]] 10월 YH 여공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강제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여공들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1명이 추락해 사망했고 이에 항의하는 신민당 당수 [[김영삼]] 등과 마찰을 빚었다. 김영삼은 미국을 향해 박정희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했다가 국회 내에서 제명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1979년]] [[10월 2일]]에 [[부산광역시|부산]]에서 대규모의 민주화 시위인 [[부마민주항쟁|부마항쟁]]이 발생하였으며, [[마산시|마산]], [[창원시|창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큰 위기감을 주었고, [[1979년]] [[10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되며 부마항쟁은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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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인 [[지미 카터]]의 집권기는 [[한미 관계]]가 악화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인권외교와 민주주의, 미군철군을 외치는 카터와 [[박정희]]는 가장 껄끄러웠던 사이였다. 또한 알려진 바는 없으나 박정희가 비밀리에 핵개발을 시도하여 미국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주장도 있다.{{출처}}
 
[[1979년]] [[6월 29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06300020920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06-30&officeId=00020&pageNo=1&printNo=17763&publishType=00020 | 제목= 朴·카터 1次頂上會談 |작성일자날짜=1979-6-30 | 작품명=동아일보 |확인일자=2009-5-13 }}</ref> [[도쿄 도|도쿄]]에서 7개국 경제정상회담을 마친 카터는 예정상 [[김포국제공항|김포공항]]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으나 김포지역의 안개로 착륙이 늦어져 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환영 인파 등 겉모습으로 ‘우방’이었지만, 카터와 대면한 박정희는 인권정책과 미군철수 문제로 마찰을 빚어야만 했고 합의점을 도출해내지 못하였다.<ref>[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2502&C_CC=AZ 기자 趙 甲 濟 의 세 계 :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봇이 붙인 제목 -->]</ref> 카터는 방한 전부터 한국 내 인권 탄압이 시정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압박했다. 카터는 영빈관에 머물러 달라는 박 대통령의 초대를 무시하고 이례적으로 서울 용산 미8군 영내에 숙소를 정했다.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은 40여 분간 카터에게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강의’했다. 화가 난 카터는 배석했던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에게 “이 자가 2분 이내에 입을 닥치지 않으면 나가 버리겠다”는 메모를 건넸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한·미 정부와 민간이 모두 말린 결과 카터는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ref>{{뉴스 인용 | url=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369608 |제목= 대통령 따라 출렁거린 한·미 관계 30년 |출판사=중앙일보사 |작성일자날짜= 2008-11-7 |확인일자=2009-5-13}}</ref>
 
=== 아시아·태평양과의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