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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부사 송상현은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최대한 많이 심어서 외부에서는 동래성을 관측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에 송상현 홀로 울산군수 [[이언성]] 등과 함께 전투를 치렀다.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새벽에 부산진성을 출발하여 오전 10시 동래성에 도착해 부대를 3개로 나누어 일대(一隊)는 황령산 기슭에, 다른 일대는 동래성 서편의 대로에, 마지막 일대는 취병장으로부터 남문을 향하도록 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 전투 과정 ==
[[1592년]] [[5월 25일]]([[음력 4월 15일]]) 일본군은 [[부산]] [[동래성]] 앞으로 몰려들었다. 경상좌병사 [[이각 (조선)|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 (1534년)|박홍]]이 지원을 왔으나 왜군의 수를 보고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도망쳐 버렸다. 양산군수 [[조영규 (조선)|조영규]] 역시 성 남쪽 4km까지 진출했으나 결국 후퇴했다.
 
그리고 무리한 전투를 피하기 위해 조선군과 협상을 위해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패목을 세우게 했고, 송상현은 곧 거기에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회답하였다. 그리고
이에 송상현 홀로 울산군수 [[이언성]] 등과 함께 전투를 치렀다.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새벽에 부산진성을 출발하여 오전 10시 동래성에 도착해 부대를 3개로 나누어 일대(一隊)는 황령산 기슭에, 다른 일대는 동래성 서편의 대로에, 마지막 일대는 취병장으로부터 남문을 향하도록 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무리한 전투를 피하기 위해 조선군과 협상을 위해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패목을 세우게 했고, 송상현은 곧 거기에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회답하였다.
 
결국 전투가 시작되어 송상현은 [[부산진 전투]] 상황을 보고 받았는지 두꺼운 통나무로 방어책을 만들었으나, 방패가 얇아 조총을 막아주지 못하였다. 조선군이 통나무를 이용한 방어물을 준비했듯이 일본군 역시 성의 공략을 위해 허수아비를 장수처럼 변장시켜 장대 끝에 꽂아 수비군을 유인하였다. 이것은 조선군의 주무기인 활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동래성 안에서는 백성들까지 수비에 가담하여 저항하여 한동안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듯하였으나, 일본군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한 동문의 인생문(人生門)을 집중공격함으로써 방어선을 뚫는 데 성공하였다.
성이 뚫리고 동래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쓴 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조방장 [[홍윤관]]과 [[김희수]], [[대송백]]도 전사하고 그리고 왜군을 보고 도망갔던 양산군수 조영규와 울산군수 이언성이 응원차에 달려와 싸웠으나 조영규는 전사하고 이언성은 포로가 되어 훗날 [[이덕형]]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일본]]의 지휘관은 송상현의 용감함에 감탄하고, 그의 사체를 정성스럽게 메워, 그 무덤에는 "충신(忠臣)" 이라고 쓴 목제의 비석을 세웠다.
 
== 결과 및 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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