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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의 땅을 [[평양]]에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과 걸걸중상 부자도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 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ref>육정산(六頂山)</ref> 기슭에 발해(渤海)를 세우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세웠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형식상 관직을 수여하였는데, 이때부터 발해를 자주국가로 인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