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혁 (159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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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년(광해군 4년)에 진사 1등 4위로 급제하여 1623년(인조 1년) 계해 참봉을 맡았다. 이듬해인 1624년 알성문과에 을과 4위로 급제하였다.
1625년 1월 18일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었고, 10월 6일 예문관 검열을 맡았다. 이듬해인 1626년 1월 5일 주서를 맡았다.
다음해에는 정언(正言)이 되고, 仁祖(인조) 7년 기사(1629) 己巳(기사) 10월 3일 홍문관 부수찬(弘文館 副修撰), 같은해 3월 22일 숭정전(崇政殿)에서 문신의 정시(廷試)를 실시하였는데, 시험은 칠언배율(七言排律) 20운(韻)으로 보았다. 이조좌랑 [[홍명구]](洪命耈), 우부승지 [[이경석 (조선)|이경석]](李景奭), 예조 참의 [[정백창]](鄭百昌), 사인 [[정홍명]](鄭弘溟), 수찬 김광혁(金光爀) 등이 입격하였다. 홍명구는 자급을 올려 주고, 이경석․ 정백창에게는 각기 반숙마(半熟馬) 1필씩을, 정홍명에게는 아마(兒馬) 1필을, 김광혁에게는 표피(豹皮) 1장을 각각 하사(下賜)하였다.
 
1630년 8월 3일 교리(校理), 1631년 2월 2일 헌납, 1633년 10월 6일 수찬, 같은해 11월 10일 헌납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