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마누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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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만은 [[751년]] 혹은 [[750년]] [[6월 28일]]에 [[수아송]]에서 [[네우스트리아]], [[부르고뉴]], [[튀링겐]] 및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피핀 3세]]와, [[레온]] [[백작]] [[하리베르트 (레온)|하리베르트]]와 쾰른의 베르트라다의 딸 [[랑의 베르트라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74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카를로만은 [[피핀 2세]]의 후손으로, [[카를 마르텔]]의 손자이자 같은 이름을 가진 큰아버지 [[카를로만 (궁재)|카를로만 1세]]의 조카였다. 카를로만의 어머니 [[랑의 베르트라다]]는 [[피핀 2세]]의 동생 [[마르틴 드 헤르스탈]]의 손녀였으며, 마르틴의 부인 베르트라다는 [[메로빙거 왕조]] 출신 [[테오도리히 3세]]의 딸이었다. [[753년]] 부왕 [[피핀 3세]]에 의해 형 [[샤를마뉴]]와 함께 [[로마]]의 파비아로 가서 [[교황 스테파노 2세]]로부터 왕의 정당한 후계자로 축성을 받았다. [[754년]] 카를로만과 형 [[샤를마뉴]]는 [[랭스 대성당]]에서 즉위한 아버지 [[피핀 3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카를로만에게는 형 [[샤를마뉴]] 외에도 아버지와 같은 이름인 피핀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그러나 동생 피핀은 어려서 요절했다. 유년 시절 카를로만은 [[아우스트라시아]] [[공작]]직을 받았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카를로만은 일찍부터 10살 터울의 자신의 형 [[샤를마뉴]]와 서로를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카를로만과 [[샤를마뉴]]는 서로 자신만이 아버지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756년]] [[피핀 3세]]는 두 아들의 갈등을 조정하려 했고 교황의 도움으로 이를 해결했다. 아버지 [[피핀 3세]]는 카를로만과 [[샤를마뉴]] 형제에게 서로 협력할 것을 주장했지만 두 형제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762년]] 소년이었던 카를로만은 아버지 [[피핀 3세]]가 군사를 이끌고 [[아키텐]] 토착 귀족 바이프레드의 영지인 [[바스코뉴]]와 [[비루리캄]](Bituricam, 후일의 [[부르쥬]]) 지역을 공략할 때, 동행하였다. 프랑크족 출신 첫 부인과 사별한 후 카를로만은 자신보다 연상이었던, [[랑고바르드]]의 왕 [[데시데리우스]]의 딸 게르베르가와 결혼하였다. 카를로만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미 한 번 결혼했다가 과부가 되었던 게르베르가와의 결혼을 수락하였다. 그러나 카를로만이 게르베르가와 결혼한 것은 아버지 [[피핀 3세]]에 의해서였다고도 한다. 첫 아이가 태어나자 카를로만은 아이의 이름을 자신의 아버지이자 아이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피핀이라 했다. 게르베르가는 카를로만 2세에게 피핀과 샤를, 카를로만, 그밖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아들, 딸 이다(Ida), 쿠니군데 외에 몇명의 자녀를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