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영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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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 왕창'''(英宗 王淐, ? ~ ? [[1월]])은 [[고려]] 중기의 왕족이며, 작위는 '''안경공'''(安慶公)이다. [[고려 고종|고종]]의 둘째 아들이며, [[고려 원종|원종]]의 동생이다. 원래의 이름은 간(侃)이었으나 나중에 창(淐)으로 고쳤으며, [[임연]]의 추대로 등극하여 [[1269년]] 6월부터 11월까지 왕위에 있었으나 [[몽골 제국]]의 압력으로 폐위당했다.
 
== 생애 ==
=== 몽골과의 교섭활동 ===
 
[[1253년]] 후(侯)에서 공(公)으로 진봉(進封: 작위가 오름)되었다. 그 해 7월 쳐들어온 몽골군과 같이 온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이 무신정권의 수장 [[최항 (고려)|최항]](崔沆)에게 편지를 보내어 태자(훗날의 [[고려 원종|원종]])이나 안경공으로 하여금 몽골군을 맞이하게 하면 군사를 물리겠다고 제안하였다. 조정 신하들은 왕준의 말을 따르자고 했으나 최항은 몽골군이 태자나 안경공을 인질삼아 항복을 요구할 수 있다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각지에서의 전투로 피해가 커지자 12월 안경공을 몽골에 사신으로 보냈다.
 
안경공은 [[1254년]] 1월 몽골 장수 아모간(阿母侃)의 군사를 접대하여 군사를 물리게 하고 몽골로 가서 [[몽케]]를 만난 후 8월에 귀국하였다. 이때 오랑캐 풍습이 물들었다면서 굳이 하룻밤을 육지에서 머무르고 입었던 옷을 태운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고 [[강화도]]로 들어왔다. 이후 [[1257년]], [[1259년]], [[1265년]]에도 몽골과 교섭하였다.
 
=== 등극과 폐위 ===
[[김준 (고려의 무신)|김준]]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임연은 거사에 동참했던 [[환관]] 김경(金鏡)과 [[최은]](崔[王+恩])이 원종의 총애를 받아 권세가 커져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1269년]] 6월 두 사람을 죽이고 뒤이어 원종까지 도모하려 했다. 시중(侍中) [[이장용]]은 현실적으로 임연의 의도를 막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리하여 원종은 별궁으로 쫓겨나고 임연의 추대로 [[6월 21일]] 안경공이 제0대고려의 임금임시 임금인 영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김준 (고려의 무신)|김준]]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임연은 거사에 동참했던 [[환관]] 김경(金鏡)과 [[최은]](崔[王+恩])이 원종의 총애를 받아 권세가 커져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1269년]] 6월 두 사람을 죽이고 뒤이어 원종까지 도모하려 했다. 시중(侍中) [[이장용]]은 현실적으로 임연의 의도를 막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리하여 원종은 별궁으로 쫓겨나고 임연의 추대로 [[6월 21일]] 안경공이 제0대 임금 영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영종은 임연을 [[교정별감]]으로 임명하는 한편, 원종을 [[상왕]]으로 받들고 몽골에는 원종의 병이 위중하여 부득이하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거짓으로 알렸다. 그러나 몽골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태자(훗날의 [[고려 충렬왕|충렬왕]])가 이 사실을 알고 다시 몽골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진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몽골에서는 군사력을 동원할 움직임을 보였으며 11월에 사신 흑적(黑的)을 보내왔다. 임연은 이를 무마하려 했으나 별다른 대책이 없었기에 흑적의 말에 따라 원종을 복위시켰다. 때문에 영종은 다시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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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시호는 미상이다영종대왕이다. [[고려사절요]]의 [[공양왕]] 3년조를 보면 [[1391년]] [[1월]] [[공양왕]]이 그의 기일을 맞이하여, 그의 묘소에 치제하려 하자 [[예조]]에서 반대하는 대목이 나온다. [[예조]]의 계에 의하면 "安慶公淐以元宗母弟, 擅自簒立不當稱爲英宗今遇忌日致祭有乖大義"라 하였다. 이는 "안경공 창은 원종의 동모 형제로서 제멋대로 찬탈하였으니 영종(英宗)이라고 일컫는 것은 부당합니다. 지금 그 기일을 당하여 치제(致祭)하는 것은 대의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