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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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의 네덜란드 이름은 '''헤리트 헤리촌'''(Gerrit Gerritszoon)이었다. [[1466년]] 또는 [[1469년]] 10월 27일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생년은 알려지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호이징하]](Johan Huizinga)에 따르면 그는 27일 또는 28일의 밤에 태어났고 [[10월 28일]]이 생일로 기념됐다. "에라스무스"라는 이름은 [[성 에라스무스|성인]]의 이름을 따서 [[세례명]]으로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ref>Huizinga, Erasmus, pp. 4 and 6 (네덜란드어판)</ref> [[로테르담]]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4년 동안만 그곳에서 살았고 로테르담을 떠난 후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가족과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는 그의 저작에서 찾을 수 있지만 모호한 것이 많다. 그가 [[사생아]]였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의 아버지는 나중에 로헤 헤라트(Roger Gerard)라고 불리는 [[로마 가톨릭]] 신부가 됐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이름이 마하레트(Margaret)라는 것과 [[외과의사]]의 딸이었다는 것 밖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ref>19세기 [[찰스 리드]](Charles Reade)의 유명한 소설 《''The Cloister and the Hearth''》(수도원과 가정)은 에라스뮈스의 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ref> 그는 사생아였지만 부모로부터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부모는 [[1483년]]에 [[흑사병]]으로 일찍 죽을 때까지 그를 키웠다. 이 시절에 그는 여러 수도사 학교에서 수학했다. 특히 [[공동생활 형제회]](''Brethren of the Common Life'')가 운영한 학교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모방》(''The 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을 통해 신과의 개인적 만남의 중요성에 대해 연구하고, [[수도원]]과 [[학교]]의 엄격한 규율을 피했다.
 
[[1487년]] [[스테인]](Steyn) 마을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의 수도원에 있을 때, 그는 동료 [[수사 (기독교)|수사]]였던 세르바티우스 로게루스(Servatius Rogerus)에게 열정적인 편지를 보내곤 했다. 에라스무스는 그를 "나의 반 쪽"이라고 부르면서 "불행하고 잔인하게도 나는 너를 좋아한다"고 썼다.<ref>{{서적 인용|제목=''Collected Works of Erasmus'', vol. 1 |쪽=p. 12 |출판위치=Toronto |출판사=University of Toronto Press |발행년도연도=1974}}</ref><ref>{{서적 인용|저자=Diarmaid MacCulloch |발행년도연도=2003 |제목=Reformation: A History |쪽=pg. 95}};<br /> MacCulloch는 "그가 사랑에 빠졌다"고 썼고,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인용문|에라스무스와 로게루스의 관계는 현대 연구자들을 상당히 당황하게 만든다. 그러나 다음의 책에서 호이징하의 견해를 참고하라.<br />{{서적 인용|저자=J.Huizinga |제목=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Erasmus of Rotterdam'') |출판위치=London |발행년도연도=1952 |쪽=pp. 11-12}}과 {{저널 인용|저자=Geoffrey Nutuall |저널=Journal of Ecclesiastical History |제목=|volume=26 |작성년도연도=1975 |쪽=403}}}}</ref>
 
=== 서품식과 수도사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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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기 ===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우신 예찬>을 써서 비상한 반응을 얻었다.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학문이나 예술에서 떠나 자연만을 주인으로 모시게 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권위주의에 빠진 기독교를 비판하고 직업적인 성직자를 비난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중년 이후에 당시 본격화되던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해, 교회 권력에 대한 루터의 비판에 호의적이기는 했으나, 광신을 싫어하여 루터와 대립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에라스무스는 로마 가톨릭교회 내의 광신자들과 그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분노하는 개신교 측 광신도들 양자로부터 비난을 받고 곤경에 처한다.<ref name="지만지"/>
 
결국 [[스위스]]로 돌아가 [[바젤]]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536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에라스뮈스는 전 유럽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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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는 [[기독교]]의 국교화 이후 권력화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절대권위에 대해 비판적인 [[인문주의자]]였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언어([[라틴어]], [[그리스어]])를 공부하면서 [[성서]]도 같이 연구했기 때문에 교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로마 가톨릭의 도덕적인 타락을 비판한 《[[우신예찬]]》({{llang|la|Moriae Encomium}}) 저술로 실천되었다. 《[[우신예찬]]》은 [[영국]] 방문 기간 동안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년]]-[[1535년]])의 집에서 쓴 교회비판서로서, 부패한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방종과 폐습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야유를 보내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파일:Erasmus hieronymus.jpg|thumb|right|[[요한네스 프로벤]]이 1516년 출간한 책]]
[[1516년]]에는 [[그리스어]]판 [[신약성서]]를 출판했다. 에라스뮈스판 성서는 [[그리스어]] 원본과 [[라틴어]] 번역을 같이 달아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으며, 10여 개의 성서번역본을 참고했다. "모든 성서가 전 세계의 여러 말로 번역되고, 시골 농부와 베 짜는 아낙네 그리고 여행객이 성서 읽기로 지루함을 달래길 바랍니다."라는 번역자의 서문<ref>[http://www.kcnp.com/new/read.asp?idx=140000001 이상규 교수의 역사 이야기33, 에라스무스2], 마지막 문단 참조</ref> 에서 알 수 있듯이, 에라스뮈스의 성서 번역은 잘못된 성서 해석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성직자]]가 성서 해석을 독점하던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교회 개혁운동 중 하나였다. 특히 서문에 나타난 성서 해석 방법으로 역사적 문법적 해석의 시도는 중세까지 내려온 4중적 의미의 해석을 단절시키는 소중한 공헌으로 평가한다.
 
[[신학]]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연구는 [[종교개혁]]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에라스뮈스는 종교개혁의 알을 낳아 주고, 루터가 그것을 부화시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는 [[루터]]의 과격한 [[종교개혁]]에 동조하지는 않아서, [[1524년]] 루터를 비판하는 글인 《자유 의지를 혹평함에 대하여》을 썼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신학에 대해서 핵심적인 비판을 했다고 말했다.<ref>[http://www.hani.co.kr/section-001065000/2004/04/001065000200404051940094.html 안효상, 〈자유의지 부정한 예정설의 루터 예리하게 반박한 에라스무스〉, 한겨레]</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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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쟁의 시작 ===
==== 루터와의 논쟁 ====
처음에 에라스뮈스는 루터의 교회 비판의 주요 내용에 동의했다. 그는 루터를 "복음의 힘찬 나팔'로 비유하면서 "루터의 개혁 요구를 교회가 시급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은 분명하다"라고 인정했다.<ref name="gmo344">Galli, Mark, and Olsen, Ted. Op. cit., p. 344.</ref> 이때 그와 [[루터]]는 서로를 존경했다. 루터는 에라스뮈스에게 자기 편에 들어오라고 제안했지만, 에라스뮈스는 그렇게 되면 자신이 일생 동안 추구했던 [[학문]]적 활동에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 위험이 있음을 이유로 거절한다. 에라스뮈스는 오직 독립된 학자로서 [[종교 개혁]]에 영향을 미치고자 했다. 한편 루터는 에라스뮈스가 [[의지]] 박약과 소심한 [[성격]] 때문에 자신의 의무를 회피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에라스뮈스는 기존 [[기독교]] 체제 안에서 필요한 개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중립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으로부터 편파적이라고 비판받았다. 그는 그들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양 세력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결국 양 세력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용문2|나는 의견의 대립이 내 천성과 [[예수]]의 가르침에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싫어한다. 나는 엄청난 손실 없이 이 대립이 진정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ref name="gmo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