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우치 가즈토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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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사 1국의 영주로서 ===
게이초 6년([[1601년]])에 영지가 가게가와로부터 도사로 이동되어 [[우라토 성]](浦戸城)에 입성하였다. 대폭적인 가증이 있어 딴 곳으로부터 들어왔던 다이묘는 그렇지 않아도 일손도 부족하게 되므로 현지에 있어 원래 가신을 고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일령구족|이치료구소쿠]](一領具足)을 중심으로 하는 옛 조소카베 일족의 무사의무사<ref>각지에서 그을림이 남아 이 과제(이전부터의 야마우치 가문의 가신을 상사, 옛 조소카베 일족의 가신을 향사(郷士)로 하는 차별적 취급)은 2대부터 [[막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향사 출신에는 막부 말기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등의 인물이 태어나게 된다.</ref>의 다수는 신영주에 반발해 도사 국 내에서 많은 분쟁(옛 주군 [[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氏)의 복귀을 원하는 등)을 일으켰다. 이것에 대해 가즈토요는 중요한 포스트를 외부로부터 들어온 인재로 굳혀, 다네키하마에서의 토벌등 어디까지나 무단조취를 취해, 이것에 대등했다. 이 때문에 목숨을 위협받는 위험성이 있어 축성을 했을 때에는 5명의 [[가게무샤]](影武者)와 함께 현지를 시찰했다.(가게무샤의 존재등은 기밀사항이었기 때문에 통상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으나, 가즈토요의 경우에는 명기되어 있는 희귀한 사례이다.)<ref>각지에서 그을림이 남아 이 과제(이전부터의 야마우치 가문의 가신을 상사, 옛 조소카베 일족의 가신을 향사(郷士)로 하는 차별적 취급)은 2대부터 [[막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향사 출신에는 막부 말기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등의 인물이 태어나게 된다.</ref> 또 고치평야 내의 오타카사카 산(大高坂山)에 통치의 중심거점으로서 고치성을 축성해(부교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낭인이 된 [[도도 쓰나이에]](百々綱家)을 7000석으로 초빙해, 게이쵸 8년([[1603년]])에 완성한다.) 성 아래 마을의 정비를 행했다. 또, 이 때의 관위가 종 4위하 도사노카미(土佐守)로 나아갔다.
 
또, 영내 백성에 대해 식중독을 신경써 가다랑어를 회로 먹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것에 대해, 백성들이 이것의 표면만 구워 회가 아니다라고 하는 음식이 되었다. 이것이 가다랑어 다짐(タタキ)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