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몽 4세 드 툴루즈 백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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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날짜=2013-6-6}}
{{왕 정보
|이름=생질의 레몽<br />Raymond de Saint-Gil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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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은 [[툴루즈 백작 기욤 4세]]의 동생이었으나, 기욤 4세가 딸 [[툴루즈 여백작 필리파|필리파]]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자, 그 지위를 찬탈하여 툴루즈 백작이 되었다. 그 때문에 필리파와 결혼한 [[기욤 9세 (아키텐)|아키텐 공작 기욤 9세]]는 여러 차례 백작의 지위를 주장하며 툴루즈를 공격했다.
 
3번 결혼했으나, 처음 2번은 근친결혼이기에 무효가 되었고, 그 이유로 2번이나 파문을 당했다. 그 때문에 최초의 아내와 아들이었던 장남 베르트랑은 서자로 보는 경우가 많다. 십자군 이전에도 스페인에서 이슬람교도와 전투를 벌였고, 제1차 십자군 참가의 권유를 받았을때도 제후중에서 가장 먼저 참가을 맹세했다고 한다. 나이로는 최연장자 였기에, 남 프랑스 제후들의 리더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1세]]에게 신종을 맹세을맹세를 했고, 물론 친구였던 [[타란토의 보에몽]]에게 동맹을 맺게 했다. [[1097년]] [[안티오키아 공방전|인타오키아 포위전]]에서는 [[피에르 바르톨로뮤]]가 [[성창]]을 발견하여 많은 십자군의 사기을 올려주었다. 그러나 결국 성창은 가짜로 밝혀지고, 레몽을 지지하던 피에르 바르톨로뮤가 아르카 공성전때 자신이 본 계시를 입증하는 실험을 하다 화상을 입고 죽자, 레몽의 힘도 약해진다.
 
안티오키아 공략후, 시내에 병사를 주둔시켰으나, 보에몽에게 쫓겨났기 때문에 보에몽의 영토확장을 방해하기 위해 자신의 영토로써 [[트리폴리 (레바논)|트리폴리]]의 소유를 원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예루살렘 진격을 바랐기 때문에 일단 중단하고, [[부용의 고드프루아]]와 함께 예루살렘을 공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