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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즉위 전 ===
[[369년]], [[근초고왕|태자 수]](須)는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남방]]을 정벌하여 [[마한]] 54개국 가운데 4개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틈을 이용해 [[고구려 고국원왕]](<small>재위:</small>331~371)이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치양성]](雉壤城, 황해도 배천, 구 모로성) 부근을 약탈하자 [[부여수|태자 수]](須)가 군사를 이끌고 맞섰다. 이때, 근초고왕의[[근초고왕]]의 말 말굽을 상하게 한 죄로 고구려로[[고구려]]로 달아났던 [[사기 (백제)|사기]](斯紀)가 다시 백제에[[백제]]에 투항하여 '[[고구려]] 군사는 머리수만 채운 허세(疑兵)이며,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직 붉은 깃발의 부대(赤旗部隊)뿐'이라고 고구려의 군사정보를 [[부여수|태자 수]](須)에게 알려줌으로써 백제는[[백제]]는 사기의[[사기 (백제)|사기]]의 말대로 고구려의[[고구려]]의 적기부대(赤旗部隊)를 먼저 공격하여 고구려군을[[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그 기세를 몰아 [[백제]] [[수곡성]]까지 함락하였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근구수왕부여수|태자 수]](須)는 여세를 몰아 진격을 계속하고자했다. 그러나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조언하기를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에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기필코 더 많은 것을 구합니까?"라고 《[[노자 도덕경]]》의 내용을 인용하여 간하니 태자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멈추고 그곳에 돌을 쌓아 표지(標識)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며 "지금 이후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라고 말하였다. 그곳에는 말발굽처럼 틈이 생긴 바위가 있어 '태자의 말발굽'이라 불리기까지 하였다. [[371년]] 고구려가[[고구려]]가 또 다시 침입하자 [[근구수왕부여수|태자 수]](須)는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군사를 [[패수]]에 매복시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기세를 몰아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 치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