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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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의 제작량을 보면 5대제작사가 132편, 독립프로덕션이 22편(1971년 11월말 현재)으로 대제작회사보다 소자본(小資本)에 의한 독립프로덕션이 활발한 제작활동을 벌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른바 '에로덕션(외설영화)'이나 폭력영화 등이 다량으로 제작되고 있으며 성인용의 심야 극장이 성행한다. 대제작사의 붕괴현상을 비롯한 일본영화산업의 쇠퇴현상은 무엇보다 텔레비전의 대량보급(1995년 현재 9,700만대), 성행하는 레저 붐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일본영화가 예술적인 면에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1년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의 <[[라쇼몽 (1950년 영화)|라쇼몬라쇼몽]](羅生門)>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때부터이다. 이어 몇 개의 작품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했고, <[[할복 (영화)|할복]](割腹)>(1963) 등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무사도 잔혹이야기]]>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그리고 <[[무호마쓰의 일생]]>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되어 평가를 받았다.
 
전후의 일본 영화계에서 활약한 감독으로는 <라쇼몬(羅生門)> <[[7인의 사무라이]]> 등의 구로자와, <[[만춘]](晩春)>의 오쓰(小津)가 있고, 60년대 이후에는 <[[원폭의 아들]]> <[[벌거벗은 섬]]>의 신토(新藤兼人), <[[인간의 조건 (영화)|인간의 조건]]> <[[괴담]](怪談)>의 고바야시(小林正樹), <[[미얀마의 수금]](竪琴)>의 이치가와(市川崑) 등 당시 40세를 넘는 중진들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누벨 바그]]라고 하는 오오시마(大島渚), 이마무라(今村昌平), 나카히라(中平康) 등이 활약하고 있다. 일본영화의 원로격인 미조구치(溝口)와 오쓰(小津)는 사망했고, 구로자와 아키라도 98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