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1756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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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와의 만남 ===
[[남인]] 학자의 가문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20세 전후에 고명한 학자들과 사귀었다. [[1780년]]([[조선 정조|정조]] 4년)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남인 학자들 사이에는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西學)이 단순한 학문으로 연구되다가 점차 그 뛰어난 진리를 깨달음에 이르러 하나의 실천학으로 받아들여 마침내 그리스도 신앙으로 귀의(歸依)해 가는 뚜렷한 움직임이 있었다.
 
=== 세례 ===
[[1783년]](정조 7년) [[황인점]](黃仁點)의 서장관으로 베이징에 가는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가게 되었다. 떠나기 전에 천주학을 연구하던 [[이벽]]이 찾아와, 교리와 그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피고 올 것과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구해 올 것을 부탁하였다. 세계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민족적 자진 귀의의 특사로서 이승훈은 이해 [[11월 8일]]([[음력 10월 14일]]) 한양을 떠나 [[1784년]] [[1월 13일]](1783년 [[음력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했다. 40여 일 동안 이곳에 머무르며 즉, [[천주교회]]나 [[성공회]]에서 [[주교]]가 목회하는 교회를 뜻하는 주교좌(主敎座)성당인 남천주당에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후, 1784년 [[음력 1월]] 이승훈은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784년]](정조 8년) [[4월 13일]]([[음력 3월 24일]]) 이승훈은 [[성서]]와 [[성상]]·[[묵주]] 등을 가지고 [[한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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