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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라는 명칭은 [[부여족]]의 동명왕이 건국한 부여, 동명왕을 계승하여 훗날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 동명왕 때에 [[북부여]] 땅을 빼앗긴 [[해부루]]가 동부 연해주로 이동해 건국한 [[동부여]], [[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해 [[고구려]] 건국의 기초를 다진 [[졸본부여]], [[백제]] 성왕이 538년 [[백제]]에서 국호를 바꾼 [[남부여]]까지 다양하다.
 
현재 문헌으로 밝혀진 이러한 동명의 출생 및 이주 과정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주몽]]의 건국설화와 거의 동일하다. 이에 따라 동명과 주몽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는데, 부여 시조로서의 동명을 인정하지 않고 동명과 주몽이 동일 인물이라 보는 견해<ref>나카 미치요(那珂通世), 〈朝鮮古史考〉《史學雜誌》5編 9號, 1894 / 이병도, 〈부여고〉《한국고대사연구》1976</ref>와 부여 시조인 동명의 신화가 원형이고 주몽이 동명 신화를 차용한 것이라 보는 견해<ref>이옥, 〈주몽 연구〉《한국사연구》7, 1972 / 이복규, 〈부여건국시조신화고〉《인문과학연구》1, 1982</ref>가 있다. 하지만 [[단군조선]]과 함께 [[단군조선]]의 후예 [[부여족]]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단군조선]]의 후예인 [[해모수]]가 동명왕으로 불려졌을 수도 있듯이 [[주몽]]은 동명왕의 아들, [[해모수]]의 자손임을 밝히기 위해 동명왕 신화를 차용한 것이라 보는 견해가 여러가지 정황에서 설득력을 갖게 하고 있다.
 
한편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1287년)에 따르면 “부여·비류국·신라·고구려·옥저·예맥의 임금은 대대로 [[단군]]을 계승한 후예다”라고 했다. 몽골의 침략을 체험한 [[이승휴]]는 [[단군]]의 후손이라는 역사의식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일제 식민지배를 목전에 둔 한말 지식인들은 정통적 역사관에서 [[단군]]을 시조로 한 혈연공동체를 강조하여 본격적으로 단일민족론을 제기하였다. <ref>단일민족론은 여기에서 기원하며, 『조선민족사개론』의 손진태는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 “한민족의 혈액 중에 만주족·몽고족·한족(漢族) 등의 혈액이 흘렀으나, 오랜 역사를 지남에 따라 한민족의 피는 완전히 한국적 피로 변화했다”고 했다(『조선민족사개론』 1946년, 44-45쪽). 단일민족은 동일한 혈족(피붙이)·지역·문화를 가진 역사공동체다. 손진태는 혈족이 단일민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봤다. 위 글에서 이민족의 혼혈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는 단서를 단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식민사학자 이병도까지 단일민족론을 지원하였다(『국사와 지도이념』 1953년).</ref>
 
== 부여의 시조 동명왕 신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