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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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역사}}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는 신라의 광역 행정구역인 [[9주 5소경]]의 한 주(州)이다. 주치(州治)는 [[하남위례성|백제 한성]](漢城) 인근인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하남 이성산성|광주 고읍]])이고으로 추정되고, [[중원경]]과 28개 군, 49개 현이 소속되어 있으며있었으며, 직접 관할하는관할한 현은 2개이다. 영역은 지금의 [[경기도]], [[황해도]], [[충청북도]] 동북부([[남한강]] 유역), [[강원도]] 일부([[철원군]], [[평강군]])이다.
 
== 연혁 ==
 
=== 한산주 이전 ===
한산주가 있던 지역은 유사 이래 [[마한]]의 북쪽지역이었다. 그 이북에는 [[대방군]]이 있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부여족]] 일파가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자 [[낙랑]]과 [[말갈]]의 침입으로부터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는 마한의 의도로의도<ref>18년([[기원전 1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을 하여 임금이 병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임진강]])에서 맞아 싸웠다.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묻어 죽였다.《[[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제1.</ref>로 서울 [[송파구]], [[강동구]]를 중심으로 [[백제국]]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한강 일대를 손안에 넣고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해 결국 서기 9년에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북부의 [[마한]] 연맹체를 웅천([[공주시노령산맥]]) 남쪽으로 밀어냈다. 지금의 경기도 일대는 백제의 중핵이 되었다.
 
[[314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에 이어 [[대방군]]을 병합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는 패수([[예성강]])에서 국경을 접했다. 두 나라는 백제 [[근초고왕]]이 [[371년]]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후 서로 영토를 뺏고 뺏기면서 항쟁을 벌이다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漢城, [[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를 [[직산]]([[천안천안시]]) 이남까지 밀어내기에 이르렀다. 그 후 백제는 [[551년]] 수도지역을한성 지역을 잠시 회복했지만 이내 신라가 이를 점령해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 한산주 ===
한산주의 치소 일대는 원래 [[백제]]의 수도 [[한성]]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고구려]] [[장수왕]] 이후 고구려가 점령하여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였고, [[백제 성왕]] 때 일시 회복했다가 다시[[553년]]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겼다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이 지역을 취하였다. 진흥왕은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557년]]에는 신주를 한산주(漢山州)로 개칭하였는데, 북한산주로이후에는 기록되기도 하였다.전세(戰勢) 개칭하였고따라 [[한강]] 유역에 한산주, 북한산주(北漢山州, [[서울시]]의 한강 이북), 남천주(南川州, [[이천시]]) 치소가설치되었다가 옮겨지기도폐지되고 하였으나합쳐졌다가 분리되기를 반복하며 치소(治所)가 옮겨다니다가, [[604년]]([[진평왕]] 26년)에 한산주로 다시 옮겼다. [[757년]]([[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고치면서 한산주도 한주로 개칭되었다. [[혜공왕]] 때 행정구역 명칭을 원래 명칭으로 되돌렸다고 한다. [[고려]] 때는 광주(廣州)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른다.
 
한산주는 [[신라의 삼국통일|삼국 통일 전쟁]] 및 [[나당 전쟁]] 수행하면서시기에도 영역이 계속 변화하였는데, 나당 전쟁 직후에는 황해도 지역은 군현이 설치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이후 북쪽으로 계속 확대하면서 영역을 정리하고 군현을 설치해 나갔다. [[694년]]([[효소왕]] 3년)에 송악성(松岳城 : [[개성시]])과 우잠성(牛岑城)을, [[703년]]([[성덕왕]] 12년3)에 개성(開城)을 쌓았고, [[748년]]([[경덕왕]] 7년)에 14개 군현을 설치하였으며 [[762년]]에도 6개 성을 쌓았다. [[헌덕왕]] 때 취성군(取城郡)을 설치하고 [[826년]]에 패강에 300리 길이의 장성(長城) 쌓아 한산주의 북쪽 경계가 완성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경덕왕이 고친 명칭을 기준으로 기록되어 있다.
 
=== 패강진 ===
신라는 황해도지역을 영토화하면서 이를 방어하고 동시에 적극적으로 북방으로의 진출을 꾀하고자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ref>대개는 황해도 평산군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ref> 일대에 [[패강진]]을 설치했다. 이로써 신라는 살수(薩水)유역까지 가시권에 넣게 되었고 발해와는 평북일대를 중립지대로 두고 접했다.<ref>조이옥(2001)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ref> 나중에 신라가 쇠퇴하면서 이 지역은 무주지(無主地)가 되어 황폐화 되었다가 후삼국시대에 고려의 영토가 되어 서경(西京)으로 승격되었다.
 
=== 한산주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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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군 (경기도)|한주(漢州)]]
| 백제 위례성(慰禮城), 한성(漢城)<br /> 고구려 한산군(漢山郡)<br /> 신라 신주(新州) → 한산주(漢山州)
| 서울시 [[경기도송파구]]·[[강동구]]<br />경기도 [[하남시]]
| 황무현(黃武縣)<br /> [[거서현]](巨黍縣)
| 남천현(南川縣)<br /> 구성현(駒城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