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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양'''(朴定陽, [[1841년]] ~ [[1905년]] [[11월]])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 내각총리대신, [[대한제국]]의 정치가이다. 구한말의 온건 개화파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였다. [[조선]]의 첫 주미국 대사이기도 했다.
 
[[1866년]](고종 3) 문과에 급제, 참판 등을 지내고, [[1881년]] [[조사 시찰단]]을 조직하여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 관제 개정을 추진했다. 87년 미국특파 전권대사로 부임하여 외교활동을 하다가 [[청나라]]의 압력으로 귀국해야 했다. [[1894년]] 1차 김홍집 내각의 학부대신이 되고, 이듬해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과도내각을 조직했다. 그뒤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의 회의원이 되고 제2차 김홍집 내각의 학부대신을 지냈다.
 
[[갑오경장]]에 참여했고, [[1895년]] 김홍집 내각 붕괴 후 내각총리대신으로 [[을미개혁]]을 추진, 과도내각을 조직하고 개혁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나 수구파와 위정척사파의 방해로 실패했다. 후에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에도 가담했으나 수구파의 방해와 위정척사파의 맹비난으로 좌절했다.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천(竹泉), 시호는 문익(文翼),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이다. [[한성부]]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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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친정 일족으로, [[판관]]과 강서현령을 지낸 박제근(朴齊近)의 아들이다. [[수빈 박씨]]의 친정아버지 [[박준원]]의 형 [[박윤원]]의 4대손이다. 증조부 박종여(朴宗與)는 서흥부사를 지냈고 할아버지 박운수(朴雲壽)는 순흥부사를 지냈다. 어려서 먼 친척인 [[박규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유대치]]의 문하에 출입하며 [[김윤식]], [[김홍집]], [[김옥균]] 등과 만나 교분을 쌓았으며 [[오경석]]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1864년]](고종 1년) 증광과 [[생원시]]에 병과로 입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서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866년]](고종 3년) [[조선의 과거 제도|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온건개화파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1879년 형조참의, 형조참판 등을 지내고 [[1881년]] [[윤웅렬]], [[어윤중]], [[홍영식]], [[조병직]], [[조준영]] 등과 함께 [[조사 시찰단|신사유람단]](神士遊覧團)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일본의 정부기관은 물론 각종 사업기관과 조폐공장 등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관제 개혁, 급여의 화폐지급, 관습법의 성문법화 추진 등 근대화 정책 추진에 참가했다. 일본을 시찰하고 [[제물포]]를 통해 귀국, 이용사 당상 경리사(理用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
 
=== 개혁 정책과 외교 활동 ===
이후 관제 개혁과 복식 개혁, [[연좌제]] 등 악형 폐지 등에 앞장섰으며, 이듬해 [[성균관]][[대사성]], [[이조]] [[참판]], [[승정원]][[좌승지]]를 거쳐 [[1883년]]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 그해 [[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 [[내무부]] [[협판]],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등을 역임하고, [[승정원]][[도승지]]·협판내무부사를 지냈다.
 
[[1887년]](고종 24년) 다시 [[협판]][[내무부|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가 되었다가 그해 [[미국]] 특파 전권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조선주재 [[청나라]]군 최고사령관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凯)의 압력으로 출발하지 못하고 [[한성]]에 머무르며 출발을 연기하였으나 그해 연말에 [[청나라]]의 방해 공작을 무릅쓰고 [[제물포 항]]에 정박된 상선을 타고 비밀리에 건너갔다. [[미국]] [[워싱턴]]에 부임하여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클리블랜드]](S. G. Cleveland)에게 신임장을 제정받는 등 외교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미국행은 조선인 최초의 외교관 파견이었다. 이때 그는 백악관 대통령 관저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미국 대통령에게 큰 절을 하자 [[그로버 클리블랜드|클리블랜드]]가 매우 당황해하여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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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집 내각 ===
1889년에 귀국하여 [[홍문관]][[부제학]]이 되었고, [[위안스카이]]는 그를 처벌할 것을 압력을 행사하였지만 고종은 그를 [[1892년]] [[전환국]][[관리]](典圜局管理)에 임명하였다.
 
이후 [[1894년]] [[호조]] 판서·[[교정청]] 당상·[[한성부판윤|한성부 판윤]]([[음력 6월 24일]]~[[음력 7월 4일]])<ref>[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64.html 서울六百年史 - 1891~1920<!-- 봇이 붙인 제목 -->]</ref> 을 지내고 [[갑오개혁]]으로 [[군국기무처]]가 신설되자 회의원(會議員)이 되었다. 동년 [[11월]] 김홍집의 2차 내각에 학부대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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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고종 33년) [[아관파천]](峨館播遷)이 일어나 [[김홍집]]이 수구파, 위정척사파 측에 의해 살해되자 내부대신으로 [[총리대신]] 서리와 [[궁내부]][[대신 (조선 말기)|대신]] 서리를 겸임했다. 이해 양력 9월 내각을 [[의정부]]로 개혁하자 [[의정부]]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고 [[1897년]](건양 1년)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윤치호]], [[이상재]] 등의 주도로 [[만민공동회]]가 조직되자 정부측 대표로 참석, 이후 만민공동회에 계속 참석하였다.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1898년]](광무 2년) [[10월]]의 [[만민공동회]]에 참석, 시정의 개혁을 약속했으나 [[수구당|수구파]]와 위정척사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양력 11월 [[황국협회]]가 폭력으로 독립협회를 탄압한 사건이 일어나 내각이 경질(更迭)되자 사직서를 올렸지만, 다시 [[대한제국 고종|고종]]에 의해 [[내무부]][[대신 (조선 말기)|대신]]이 되었다.
 
[[이상재|월남 이상재]]는 그의 문하생이다. 조선 말기의 불편부당한 온건중립파로서 진보적인 개화사상을 가지고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 개화파인사들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이들을 후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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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개화에 앞장서며 온건 개화파 인사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다가 정쟁에 휘말렸다는 평가가 있다. 한편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정대신으로 참석하여 시정의 개혁을 약속하는 등 개화에 앞장서기도 했지만, 철저하게 일본에 의존하고 결탁하는 친일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ref> {{서적 인용
|저자=김삼웅
|제목=친일정치 100년사
|발행일자날짜=1995-07-01
|출판사=동풍
|출판위치=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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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40
|꺾쇠표=예
}} </ref>'는 시각도 있다.
 
대한제국 당시 불편부당한 온건 중립파로서 진보적인 개화사상을 갖고 이상재 등 개화파 인사들의 뒤를 돌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