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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연산군]] 때의 [[무오사화|무오]]·[[갑자사화]]로 [[김종직]](金宗直) 일파의 신진 학자들은 거의 몰살당하여 유학은 쇠퇴하고 기강도 문란해졌는데,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조선 중종|중종]]은 연산군의 악정(惡政)을 개혁함과 동시에 [[중종 반정]] 이후 무한대로 축재와 권력남용을 하는 공신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연산군 때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고, 대의명분과 오륜(五倫)의 도를 가장 존중하는 성리학을 크게 장려하였다.
 
이때 뛰어난 것이 [[조광조]] 등 젊은 선비들이었다선비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정암 조광조|조광조]]는 [[김종직]]의 제자 중 성리학에 가장 연구가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서 한국 성리학의 정통(正統)을 계승한 사람이었다. [[1515년]](중종 10년)에 성균관 유생 2백여 명이 연명(連名)하여 그를 천거하였고, 이조판서 [[안당]](安塘)도 그를 추천하였으므로 곧장 6품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 뒤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전후 5년간에 걸쳐 정계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아 삼대(三代)<ref>[[하나라]]·[[은나라]]·[[주나라]]</ref>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김종직]]이 출사한 이래에 계속 중앙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사림파]]의 뜻과도 부합되었으므로 이들은 [[조선 중종|중종]]의 영입 노력을 적극 수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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