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벨라르미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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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가 재판 받은 것이 사실무근이 아니라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발언이 사실무근입니다.왜곡 마세요
갈릴레이는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철회했기 때문에 저 유명한 대사를 내뱉지 않았으며, 이런 위험한 말을 함부로 할 만큼 갈릴레이는 무모하지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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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예비 신자, 교리교사, 교회법학자
}}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llang|la|Sanctus Robertus Bellarminus}}, [[1542년]] [[10월 4일]] - [[1621년]] [[9월 17일]]) 또는 '''로베르토 프란체스코 로몰로 벨라르미노'''({{llang|it|Roberto Francesco Romolo Bellarmino}})는 [[이탈리아]]의 [[예수회|예수회원]]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추기경]]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조르다노 브루노]]를 화형 시키고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을이설을 반박하고 가톨릭교회를 변호하는 일에 앞장섰다. 1930년 [[로마 교황청]]에 의해 [[성인 (종교)|성인]]으로 [[시성 (기독교)|시성]]되었으며 ‘[[교회학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 일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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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1세는 좀 더 신경 쓴 문체의 글을 [[신성 로마 제국의 루돌프 2세|루돌프 2세 황제]]와 기독교 세계의 다른 모든 통치자에게 보내면서 두 번째 공격에 나섰다. 이러한 방식으로 제임스 1세는 스스로 근본적이고 진정한 기독교의 방어자를 자처하였다. 이에 대한 벨라르미노의 반박은 전체적인 논쟁에 대한 방위로서 다소 도움이 되었다.
 
=== 과학에 대한 탄압 ===
벨라르미노는 이단심문관이 된 이후 과학자들을 탄압하는데도 앞장섰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조르다노 브루노]]가 그의 손에 의해 화형당한 것은 유명하다.
부르노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에게 "나는 내 주장을 철회해야할 이유가 없고, 그러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철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또 "내 형량이 선고되는 것을 듣는 당신들의 두려움이 나의 두려움보다 오히려 더 클 것이다"고 말했다. 부르노에게 선고가 내려진 직후 벨라르미노와 예수회 사제들은 브루노의 턱을 쇠로 된 재갈로 채우고, 쇠꼬챙이로 혀를 꿰뚫었으며, 또 다른 꼬챙이로 입 천장을 관통시켰다. 1600년 2월 19일 일요일. 브루노는 망토를 입은 '자비와 연민단'이라는 무리가 이끄는 수레에 실린 채 구경거리가 되어 로마 거리를 돌아다녔다. 예수회 사제들은 그를 발가벗긴 뒤 불태워 죽였다.<ref>케네스 C.데이비스《우주의 발견》(푸른숲)P108</ref>
 
벨라르미노는 1616년 [[갈릴레오 갈릴레이]]에게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을 포기하라고 겁박하였다. 갈릴레오는 이에 동의하였지만 법정을 나서는 순간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 갈릴레오는 나중에 자신이 지동설 주장을 철회하고 참회할 것을 강요받았다는 소문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으며, 벨라르미노도 소문의 내용을 부정하는 증명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자신은 그저 갈릴레오에게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은 지지받거나 용인받을 수 없다는 결과가 내려졌다는 소식을 알려준 것밖에 없다고 해명하였다(1663년 갈릴레오는 또다시 이 문제로 종교재판에 소환되었다.)
 
==말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