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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현(지금의 [[안후이 성|안휘성]] 육안 부근) 출신으로, 어린 시절에 "형벌을 받을 운명이나 후에 왕이 된다"는 예언을 들었다. 그 뒤에 법을 어겨 경형(얼굴에 죄목을 문신으로 새기는 형)을 받자 스스로 예언이 이루어졌다 여기고 기뻐했으나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이로부터 '''경포'''(黥布)라는 별명이 붙었다. 형벌로 여산에서 노역에 참가하다, 같이 노역하는 죄수들 중 우두머리들과 호걸들과 교류하고 무리를 이끌고 달아나 강중에서 도둑 떼를 이루었다.<Ref name="s91">[[사마천]]: 《[[사기 (역사서)|사기]]》 권91 경포열전제31{{위키문헌|:zh:史記/卷091|사기 권91 경포열전}}</ref>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의 [[진승·오광의 난|난이 일어나자]] 동료들을 모아 파군 [[오예]]에게 가담해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고, 오예의 신임을 받아 그 사위가 됐다.<ref name="s91"/>
 
=== 항씨의 장수로서 ===
[[장한]]이 진승을 멸하고 여신을 무찌르자 북진해 진나라의 좌우 교위를 무찌르고 동쪽으로 나아가다, [[항량]]이 회계와 강동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진영이 항량에게 합류하자 진영의 뒤를 따라 포장군(蒲將軍)과 함께 항량에게 합세했다. 항량이 경구 · 진가 등을 격파할 때 공적이 으뜸이었고, 항량이 [[초 의제]]를 왕으로 옹립하면서 당양군이 됐다.<ref name="s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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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의 항복을 받은 항우가 진나라의 본토로 쳐들어가던 도중, 신안에서 항우의 명령을 받아 진나라 졸병 20여만 명을 밤중에 갱살했다. 함곡관에 도달한 항우의 군대가 함곡관을 막은 패공 [[전한 고제|유방]]에게 저지돼 넘어가지 못하자, 별동대를 이끌고 우회해 관의 병사를 격파하고 본대가 함곡관을 넘을 수 있게 했다. 항상 항우의 선봉에 서 으뜸가는 공적을 세워, [[기원전 206년]]에 진나라를 멸한 항우가 각지에 제후들을 분봉하면서 옛 초나라 영역을 넷으로 나눈 중 하나인 구강왕에 봉해졌고, 서울은 육(현 [[중화인민공화국]]의 [[루안 시]])에 두었다.<ref name="s91"/>
 
=== 구강왕이 되어, 서초를 배반하다 ===
이해 4월, 스스로 서초패왕을 일컬은 [[항우]]가 초 회왕의 이름을 높여 의제로 삼고 장사로 천도하게 하면서, 형산왕 [[오예]], 임강왕 [[공오]] 등과 함께 서초패왕에게서 [[초 의제]]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Ref name="s91"/><ref name="s7">위와 같음, 권7 항우본기제7{{위키문헌|:zh:史記/卷007|사기 권7 항우본기제7}}</ref> 이에 장수를 보내 의제를 기습해, 8월, 침현까지 추격해 살해하였다.<ref name="s91"/>
 
=== 서초에서 한으로 ===
 
한왕 2년([[기원전 205년]]), 제나라의 실권자 [[전영]]이 항우에게 불만을 품고 모반을 일으키자 서초패왕이 전영을 치러 가면서 구강의 병사를 모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병을 핑계대고 장수와 수천 명의 군사를 보냈으며, 서초패왕이 본국을 비운 사이 한왕 [[전한 고제|유방]]이 56만의 제후연합군을 이끌고 서초의 서울 팽성을 함몰하는데도 서초를 도와 싸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서초패왕의 노를 사 꾸짖음을 받고 소환령을 받았으나 두려움을 품어 응하지 않았다. 서초패왕도 당장 자신을 돕는 자가 구강왕 뿐인데다 구강왕의 재능을 아껴 공격하지는 않았다.<ref name="s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