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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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의 배경 ==
김대중은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1967년)|신민당]] 후보로 출마,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현직 대통령에게 94만의 큰 표 차이로 석패했는데, 이 대선 전후 기간 동안 김대중에게는 크고 작은 사고가 잇달기이르렀다:잇달아 일어났다. 1971년 1월엔 [[동교동]] 자택 마당에 담배갑 은박지로 싼 장난감 권총용 화약에 배터리가 연결된 사제 폭발물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처음엔 김대중의 조카인 김홍준(당시 15세)이 장난으로 한 것으로 자백하면서 해프닝으로 일단락 되는듯 싶었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1021100209201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1-02-11&officeId=00020&pageNo=1&printNo=15183&publishType=00020 爆發物사건 金候補「15세조카」拘束] 동아일보 1971.02.11</ref> 그러나 김홍준이 경찰의 위협과 가혹행위로 인해 허위자백한 것으로 이내 진술을 번복하자 경찰 수사는 미궁에 빠졌으며 결국 김홍준은 검찰의 구속 소명자료가 불충분하여 법원으로부터 석방 판결을 받는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1021300209207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1-02-13&officeId=00020&pageNo=7&printNo=15185&publishType=00020 金大中후보宅 爆發物사건 金弘準군 釋放결정] 동아일보 1971.02.13</ref>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대한민국 제8대 총선|총선]] 유세가 한창이던 그해 5월엔 지원유세에 나선 김대중이 탄 차량과 14톤 대형트럭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김대중은 이 사고로 인해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으며 서거하기 전까지도 이때의 사고를 당시 정권의 암살 음모로 지목했다. 그러나 이 사건 또한 14톤 대형트럭 기사가 최근 인터뷰를 통해 순수한 사고였다는 것을 고백함에 따라 그저 음모로 일단락 되었다. 일련의 사건 사고로 인해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과 지병의 치료차 일본을 왕래하기 시작한다. 1972년 10월 11일 일본 정계 순방을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며칠 뒤인 17일 [[비상계엄령]]과 동시에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미국으로 망명을 택한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210110020920102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2-10-11&officeId=00020&pageNo=1&printNo=15700&publishType=00020 動靜] 동아일보 1972.10.11</ref> 유신 직후부터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외신을 통해 유신 체제를 비판, 규탄하였고 [[1973년]] 7월 6일 미국 [[워싱턴 D.C.|워싱턴]]에서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초대의장으로 취임해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한편, 박정희 정부는 [[1972년]]에 [[10월 유신]]을 선포하기 전 측근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영주 (1920년)|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가졌고 [[박성철]] 제2부수상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답방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가지게 된다. 그 결과 [[7월 4일]]에 조국통일 촉진을 위한 원칙에 대한 합의가 담긴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며 남북간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10월 유신이 있기 전에도 정부에서 북한에 먼저 통보를 해주게 된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78560.html 박정희 정부, 유신선포 전 북에 통보] 한겨레 2009.09.24</ref> 이후락 부장은 김대중이 해외에서 망명정부를 세워 한국의 국제적 입지를 손상시키고 남북간 대화 분위기가 깨질 것을 우려하여 김대중을 납치, 국내로 데려오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ref name>[이후락 증언 김대중납치의 내막] 신동아 1987년 10월호</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