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팽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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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조선]] [[조선 세종|세종]] 때인 14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황보인]]·[[김종서 (장군1383년)|김종서]] 등과 함께 [[조선 문종|문종]]과 [[조선 단종|단종]]을 보필하였다. 세종 말년에 [[신숙주]], [[성삼문]], [[윤기견]], [[윤회]], 김종서 등과 [[고려사절요]], [[고려사]]의 편찬과 간행에 참여하였다.[[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전후해서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1454년]]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455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조선 세조|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안평대군]]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그를 [[형조]][[참판]]에 임명하였으나, 세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456년, [[형조]][[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 (1422년)|김질]]의 밀고로 6월 2일 잡혀 갔으며, 고문 받던 중 6월7일 사망하였다.
=== 사후 ===
뒤에 아버지와 동생, 아들까지 사형당했으나, <ref name="글로벌 서울 박팽년"/> [[사육신]] 중 [[하위지]]와 함께 유일하게 친후손이 존재한다. 그의 며느리이며 장남 [[박순]](朴珣)의 아내 이씨는 [[사육신]]에 연좌되어 노비가 되었는데, 며느리 이씨와 한 여종의 기지로 그의 아들은 무사하였다 한다. 뒤에 그 아이는 박비라는 이름으로 숨어 지내다가 [[조선 성종|성종]]때 자수하여 성종으로부터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