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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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처럼 무딘 도끼나 교수형으로 사형수의 형을 집행하는 것은 인도적이지 않고, 형집행자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기에, 기구로 형을 집행하자는 주제의 논문으로 제출하였다. 기요탱은 이 기구로 사형수들이 고통없이 죽을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실제로 이 기구의 설계에 기요탱 박사의 공헌은 미미하고, [[안토닌 루이]] 박사가 기요탱 박사가 제안한 생각을 발전시켜, 설계한 뒤 이 기구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 사형기구가 루이종, 또는 루이세트로 불렸으나, 언론에서 기억하기 쉽다는 이유로 [[조세프 이그나스 기요탱|기요탱]] 박사의 이름을 따서 이름붙여졌다. 그 결과 기요탱 박사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단두대의 구조는 2개길게 기둥이세워진 맨꼭대기에 연결되어있고 두2개의 기둥 사이에사이로 날이 비스듬한비스듬하고 묵직한 [[무쇠]]칼이칼날이 끼워져꼭대기에 밧줄로 매달려져 있다. 사형수는 틀의 아랫부분에 목이 칼날 바로 밑부분에 위치하도록 고정되며,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끊으면 칼이 떨어져 목을 자르는 것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도 여기서 죽었으며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당통]] 역시 이 기구로 인하여 죽었고, 과학자 [[라부아지에]]도 여기에서 죽었다. 단두대로 많은 사람을 죽인 [[로베스피에르]]는 역설적으로 이 기구에 의해 죽었다. 단두대를 고안한 기요탱 박사도 단두대에서 죽었다고 전해지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1814년]] [[5월 26일]]에 자연사하였다.
 
[[프랑스]]에서 단두대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때는 [[1977년]]이었으며 9월 10일이었으며, [[1981년]]에는 [[사형제]]를 폐지했다.
 
[[1930년]]에 [[아돌프 히틀러]]는 기요틴을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데 사용하였으며 그 수만 2만명을 넘는다. (이는 프랑스에서의 기요틴으로 인한 죽은 자들의 수 보다 많은 수치이다.) 베트남 전쟁 시절 남베트남 간수들에 의해 공산 포로들이 단두대로 처형당했다. 그 밖에도 [[벨기에]]나 [[스웨덴]], [[룩셈부르크]]도 단두대를 사용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