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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시절이었던 [[1943년]] [[영화]] 《우러르라 창공》으로 [[영화 배우|영화배우]] 데뷔한 그는 한때 [[1947년]]에는 [[성우]]로도 활동했으며 이듬해 [[1948년]] [[연극]][[배우]]로도 데뷔하였고 1년 후 [[1949년]] 영화 《북위 38도》로 영화배우 분야에 복귀했으며 2년 후 [[1951년]] 영화 《삼천만의 꽃다발》이라는 작품으로써 영화배우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2년 후 [[1963년]] 영화 《미행자》에 주연, 이 영화로 영화 기획가 데뷔하였다.
 
[[1996년]]에는 [[대종상|대종상영화제]] 특별연기상을 수상했다. 또한 그 밖에도 《[[제1공화국 (드라마)|제1공화국]]》, 《[[조선왕조 오백년]]》, 《[[제2공화국 (드라마)|제2공화국]]》, 《울 밑에 선 봉선화》, 《[[역사는 흐른다]]》, 《[[삼국기]]》, 《[[제3공화국 (드라마)|제3공화국]]》, 《[[제4공화국 (드라마)|제4공화국]]》 등의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출연하여 [[배우]]로서의 영역을 넓힌 그는 [[1990년대]] 이후에도 1996년 영화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 가지 이유》, 《카루나》, 《[[축제 (영화)|축제]]》에 이어 1999년 영화 《카라》와 2003년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이르기까지 주연과 조연과 단역을 가리지 않고 출연하였으니 1943년 데뷔 이래부터 2003년까지 약 1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2004년]] [[연극]] 《세종대왕》을 끝으로 [[배우|연기자]] 분야에서 은퇴하였다. {{출처|그는 원로배우로서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몇 안 되는 배우이며 배우 [[윤다훈]]의 부친이[[아버지|부친]]이 좋아하는 배우라 하여 한때 이목이 집중되기도 하였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