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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하게 개혁이 요구 되는 신라에 최치원이 나타났다.그는 당나라에서 884년 음력 10월 귀국했다. 885년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 태산(太山 : 지금의 전북태인)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나라의 멸망을 앞당긴 [[진성여왕]]은 그래도 반란군과 호족세력이 난무하는 가운데서 인재들에게 개혁안을 올리라고 독촉하였다. 최치원은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상소해서 아찬이 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인하여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이와 함께 신라의 국운도 종말을 고했다.
 
신라의 개혁실패는 1000년 왕국의 도읍 서라벌에서 도적들이 나라의 서남쪽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은 바지를 붉은 색으로 하여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적고적(赤袴賊)이라 불렀다. 주현(州縣)을 무찔러 해치고 서울의 서부 모량리(牟梁里)에까지 이르러 민가를 약탈하여 갔다. 이 사건은 신라의 개혁이 완전히 실패하고 소생 가능성이 희박해진 것을 뜻한다.
 
==후삼국의 쟁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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