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9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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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2년 레오 9세는 [[브라티슬라바|프레스부르크]]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만나 헝가리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레겐스부르크와 밤베르크, 보름스에서는 교황의 방문을 장엄한 교회 예식으로 맞이하였다.
 
한편 이탈리아 남부는 [[노르만족]]의 계속된 침략으로 신음하고 있었는데, 동로마 제국은 이를 타개하고자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풀리아의 윌리엄]]에 의하면, 동로마 제국은 레오 9세 교황에게 이탈리아를 해방시켜 자유를 되찾게 해주고, 아풀리아 지역을 장악해 그곳 주민들을 억압하고 있는 저 악랄한 민족이 속히 물러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1053년 제4차 예수 부활 대축일 시노드가 폐막된 후, 레오 9세는 직접 이탈리아인 병사들과 [[슈바벤]]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노르만족 군대를 격퇴하러 출병하였다.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노르만족은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인 교황과 싸우기를 꺼려하여 협상을 요청했으나, 슈바벤 용병들이 그들을 조롱하자 결국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ref>Robert Bartlett, ''The Normans of the South'' BBC TV</ref> 레오 9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었지만, 그의 군대는 1053년 6월 15일 [[치비타테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그럼에도1053년 6월에서 1054년 3월까지 레오 9세는 노르만족으로부터노르만족에게 항복한 후, 베네벤토에 인질로 잡혀 지냈다. 하지만 포로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융숭한 영접을대접을 받았다. 결국 노르만족의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풀려나 로마로 받아돌아왔으나, 그들에게서오래 항복의살지 표시로못하고 사죄와1054년 충성의4월 맹세를19일에 받아냈다선종하였다.
 
가까운 친척 사이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3세]]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교황의 수기 기록자 실바 칸디다의 훔베르트에 의하면 교황은 [[로마]]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이 원하여 교황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교황의 주위에는 젊은 개혁가들이 여러 명 있었다. 르미르몽의 위그, [[교황 스테파노 9세|로렌의 프레데리크]], 국무장관 훔베르트, [[교황 그레고리오 7세|힐데브란트]] 등 모두 쟁쟁한 인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