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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許憲, [[1885년]] [[음력 6월 11일]] [[함경북도]] [[명천군]] ~ [[1951년]] [[8월]])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법조인 출신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이인]], [[김병로]]와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던 변호사로,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 유명했다.
 
[[한성중학교]], [[보성전문]]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1907년]]에는 [[대한제국]] 제1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일본]]에서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 뒤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와 노동자들의 고용 문제, 임금 인상 문제 등을 무료로 변론하였으며 [[1924년]] [[보성전문학교]] 교장 취임과 조선인변호사 회장을 겸임 [[동아일보]] 사장직무대행등 각종 사회활동 하였다. [[1926년]] 6개월동안 세계일주 여행 간것으로 유명하며, 이듬해 1927년에는 [[신간회]] 단체 주요간부로 활동하였다. [[1943년]]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단파방송 밀청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광복 이후 [[1945년]] [[8월]] [[여운형]], [[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부위원장을 거쳐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에서는 [[국무총리]]에 선출되기도 했다. 인공 해체 후 [[남조선]]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남조선로동당]]등 활동하다가 탄압받자,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북으로 건거난 뒤 정착하였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의장(의회 의장)에 선출되기도 하였고, [[김일성대학]] 총장이 되었다. 통일운동가로 활동하다가 [[1951년]] [[8월]] 청천강에서 익사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성운동가 [[허정숙]]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호는 긍인(兢人). 함북 명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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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기 ===
==== 출생과 소년기 ====
허헌은 [[1885년]] [[음력 6월 11일]] 함북 [[명천군]] 하우면 하평리에서 [[향반]]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5년]] 11세 때 아버지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와 광화문 인근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신설된 관립재동소학교에 입학하였고, [[1899년]]에는 한성중학교로 진학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이 무렵 허헌의 아버지 허추(許抽)는 [[궁내부]] 경위원에 근무했다고 한다. 그런데, 허추는 건강이 나빠져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기로 결정하고 아들 허헌을 [[이용익]]에게 맡겼다. 어린시절 허헌은 [[이용익]]의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파일:Heo Jong-suk.png|thumb|160픽셀|딸 [[허정숙]]<br />(본부인 정보영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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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과 무료 변론 ====
{{참고|3·1 운동|민족대표 33인|민족대표 49인}}
[[1919년]] [[조선변호사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3월]]의 [[3·1운동]]은 그를 대표적 항일변호사로 만들어 주었다. 3.1 운동 당시 허헌은 민족대표 33인과 관련자 14인을 포함한 47인에 대한 변론을 맡았다. 그는 일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해박한 법 이론 지식으로 피체된 3·1운동의 지도자들을 변호하여 일제를 당황하게 하여 유명해졌다.<ref name=donga/> 또한 체포된 49인에 대한 공판 때 공판정에서 불기소 수리(不起訴受理)를 제출하기도 하여 법정에서 총독부 형사들이 반발하는 등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뒤 허헌은 전국적 명성을 안고 [[의열단]],[[조선공산당]] 사건등 무료 변호를 맡는 등 일상적인 변호사 업무 외에 여러 사업을 벌였다.
 
1920년대에는 변호사 업무와 동시에 교육사업에도 열중했는데, [[1921년]] [[함흥영생학교]] 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이어 [[이상재]]등과 함께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벌였는데, 총독부에서 인가를 내주지 않았지만 경성제국학 예과를 설립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외에도 여성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여성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차미리사]]를 도와 [[근화학원]] 설립에 나섰고,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에는 8000여원의 거금을 출자하고서 감사를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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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당시 경영이 부실한 [[보성전문학교]] 교장에 취임과 조선인변호사 회장을 겸임 하면서 민족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 해 4월말에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사장직에서 물러났을때 [[동아일보]] 사장직무대행으로 잠시 맡기도 했다.<ref>[http://news.donga.com/3//20091022/23603641/1 이승만과 단파방송 사건]</ref>
 
[[1925년]] 4월, [[조선 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보내어진 [[조동호]], [[조봉암]]이 [[1928년]] [[2월]] [[상하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자 이들을 위하여 서울 경성지법에서 무료 변론을 해주었다. 이 일로 허헌은 [[일제강점기|조선]] 국내뿐만 아닌 [[일본 제국|일본]]에서도 알려지게 된다.
 
한편, 이무렵 허헌은 중도좌파적으로 [[사회주의]] 성향으로 기울게 된다. [[박헌영]]을 비롯한 [[신의주 사건|조선공산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동조자적인 변론, 공산주의자들과의 폭넓은 교우, 그리고 딸 [[허정숙]]과 사위 [[임원근]]이 모두 [[조선공산당]] 간부였다는 점이 그를 사회주의 성향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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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활동 분야는 부당한 해고와 불이익을 당하는 조선인 민간인, 조선인 지식인 조직체와 문필활동,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변호와 법조문 관련 내용, 인간의 기본권, 노동자들이나 빈민층을 위한 변호활동 등이었다. 특히 노동자들의 노동권리 문제와 임금 인상 문제, 그리고 그 밖의 사회문제로 인한 재판에 변호사로 활동, 무료 변론으로 여러번 승소하였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는 상당한 신망을 얻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단체행위에 의한 부당해고문제나 임금투쟁에 대한 문제에 앞장서서 변호하였으며, 이들 노동자들이 반정부나 반[[조선총독부]] 성향이 아님을 들어 부당 해고를 당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복직과 배상, 임금 인상 문제의 타협 등을 성사시켜 한인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와 권리 향상에 기여하여 명성이 높았다. 한편 좌우합작의 독립운동단체였던 신간회 등이 결성될 때는 좌측의 대표로 참여하였다.
 
==== 세계일주 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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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허헌은 무엇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더욱 견문을 넓혀야 한다는 의지에서 구미(유럽과 미국) 유학의 뜻을 품고 준비를 서둘렀다.<ref name="독립 운동"/> 맏딸 [[허정숙]]은 [[배화여고|배화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에 돌아와 있었다. 허헌은 자신의 딸을 여성운동가나 지도자로 키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미국 유학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되는 등의 일이 발생하자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미국으로 갈 때 딸 허정숙을 데려갈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가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허정숙과 함께 미국 가는길에 올랐다. 그는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을 6개월 동안 돌아보고 나서 딸을 미국에 남겨두고 발길을 [[유럽]]으로 돌렸다. 그는 미국 유학의 꿈을 접고 여러 나라 사찰에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스위스]], [[바이마르 공화국|독일]],[[소련]], [[중국]] 등 대륙횡단 여행을 6개월동안 하고 돌아왔다.
 
[[파일:허헌 귀국.JPG|right|thumb|300px|1927년 5월 14일자 동아일보. 허헌이 아일랜드에서 겪은일을 기행문으로 쓴 글.]]
당시 대륙횡단 여행을 하는 사람이 손에 꼽힐 정도로 흔치 않아서<ref>다른 세계일주 여행자는 [[인촌 김성수]], [[최린]]이 있었다.</ref>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여행기는 [[삼천리]] 잡지에 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ref name="독립 운동"/><ref>[http://db.history.go.kr/front/srchservice/srcFrameSet.jsp?pSearchWord=DLCODLCCGGIGCHJOACCKCNNCCOFC&pSearchWordList=DLCODLCCGGIGCHJOACCKCNNCCOFC&pSetID=-1&pTotalCount=0&pSearchType=1&pMainSearchType=2&pQuery=GGIOGGKIGGKPGGJAGGIODLCODLCCGGIGCHJOACCKCNNCCOFCGGIPGGIP&pSearchClassName=&oid=&url=&method=&lang=&code=&searchword=&return= 허헌 세계일주]</ref><ref name="독립 운동"/>
 
==== 신간회 활동 ====
[[파일:신간회_창립신간회 창립.jpg|thumb|250px|left|[[신간회]] 창립 모습 (1927년 2월 14일)]]
{{참고|신간회|근우회}}
귀국한 이후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되어 민족단일당(民族單一黨) 결성과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신간회]]에서 허헌은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청년운동, 형평운동 등의 단체와 연계를 추진해 강연을 여러번 나서면서 활동했다.<ref name="독립 운동"/> 그러나 [[신간회]] 서울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趙炳玉)이 허헌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의 [[신간회]] 가입이 무산되면서 여기에 반발한 [[신간회]][[광주]], [[목포]]등의 지회가 이에 가세하여 내분이 계속되었다.
 
그의 신간회 활동은 한때 국내의 합법적인 독립운동 단체, 자치 운동 단체로 지향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었다. 그는 자치 운동도 일부 수용할 의사를 밝혔지만 좌익의 강한 반대와 배타성, 종파주의적 성격과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결국 [[신간회]]는 분해, 해산되고 말았다. [[1927년]] [[보성전문학교]] 교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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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이르러 교수 월급으로 생계가 궁핍해진 그는 부동산과 광산업에도 뛰어들게 되었다. 그는 [[윤치호]]나 [[김성수 (1891년)|김성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처지까지 가기도 했다.
 
일제 말기 [[1943년]] [[단파방송 밀청 사건]]에 연루되어 연행되었다. 당시 허헌은 58세 나이로 심한고문을 받았고 딸 [[허정숙]]이 망명한 혐의도 죄명에 포함되었다. 그는 2년 정도 옥고를 치르다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1945년]] 4월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그 뒤 허헌은 재취 아내의 처가가 있는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의 처가로 내려가 달천온천에서 휴양을 하면서 해방을 맞이했다.<ref name="독립 운동"/><ref>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보수세력에서는 '허헌은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으로 지내면서 친일단체에 협력했다.'고 친일의혹을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허헌은 철저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1943년 단파방송 밀청사건때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룬것등을 감안하면 논리상 맞지 않는다. 이무렵에 일제는 거의 모든 분야에 발악했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독립운동지사들 명의를 도용하면서까지 각종 어용단체에 넣기까지 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조만식]],[[안재홍]],[[김병로]],[[여운형]],[[홍명희]],[[한용운]],허헌 등이다.</ref><ref name="독립 운동"/>
 
[[1945년]] [[4월]]부터 4개월간 신천에서 요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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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허헌선생.jpg|썸네일|왼쪽|허헌]]
{{참고|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과 [[여운형]]의 주도아래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허헌이 [[황해도]] [[신천군]]에서 요양생활 했을때, 건준 위원장 [[여운형]]은 사람을 보내 허헌을 초치하고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를 당부했다. 이무렵 허헌은 요양 중이었으나 흔쾌하게 승낙하고 서울로 올라왔다.<ref name="hoseun"> 허은, 〈8·15직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강만길 외,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역사비평사,2000)307~308쪽.</ref> 당시의 기록 의하면 그는 '나는 전부를 여선생께 바치겠다. 나는선생을 믿고 모든 지혜를 짜서 돕겠다.'고 했다 한다.
 
한편 허헌은 [[한국민주당]] 출범 초기까지만 해도 [[한민당]]에 대한 비난은 자제했지만 갈수록 허헌의 공개연설은 [[조선공산당]] 옹호와 [[한국민주당]] 비난의 색채를 점점 짙게 띠어갔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항일독립운동은 거의 상당수가 [[공산주의]]자들이 수행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이런 점에서 "우리는 조선공산당에게도 감사해야 한다"고 역설한뒤 한민당이 건준에도 협력하지 않고, 친일파나 테러리스트들까지도 옹호하며 조선의 완전독립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계열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진출에 불만을 품던 [[안재홍]]을 찾아가 여러 번 설득하였으나 [[안재홍]]은 듣지 않았고 곧 탈퇴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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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민족주의 민주전선|대한민국 임시정부}}
 
[[1946년]] [[2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떠난 [[김원봉]], [[김성숙 (1898년)|김성숙]], [[장건상]], [[성주식]] 등이 민족주의민주전선에 참여할때 [[여운형]], [[백남운]], [[박헌영]], [[김원봉]]과 함께 [[민족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에 추대되었다.<ref>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11쪽, 226쪽 </ref> 이어 민주주의민족전선 수석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민족주의민주전선 개회사에서 허헌은 임시정부가 주최하는 비상국민회의를 염두에 두며 법통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며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며 비난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26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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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공개적으로 부정하였다.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음을 주지시키며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라고 비난했다.<ref name=donga/>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법통 부정 이후 그는 극우단체의 공적으로 성토되었고, 테러의 주된 표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우익 청년단체의 습격과 테러를 피해 여러번 거처를 옮겨다녀야 했다. 한편, 허헌은 해방 정국 정치정당에 가입하지 않고 개인자격으로 활동했다.
 
허헌은 감옥에서얻은 병의 후유증이 겹쳐 건강이 좋지 않았다.<ref name=donga/> 그러나 민전 소집일에는 항상 참석하는 등의 정력을쏟았으며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이래가지고 무슨 건국사업을 하겠느냐", "이렇게 열의가 없어서 독립국가를 운영해 나갈수 있느냐"고 야단치곤 했다.
 
==== 체포령과 은신 ====
{{참고|남조선로동당}}
[[1946년]] [[11월]] [[남조선로동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된 뒤 [[여운형]]이 당수직에 앉았다가 [[박헌영]]과의 갈등으로 물러나자, 그는 [[1946년]] [[12월 2일]] 제2대 남로당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무렵 허헌은 [[박헌영]] 노선을 지지하면서 따랐다. 이후 [[1947년]] [[8월 11일]] 미군정 당국은 [[남로당]] 당수 허헌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면서 남한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이라고 선언하였다. <ref>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2004) 58쪽.</ref>
 
박헌영과 허헌에 대한 수배와 탄압을 피해,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편을 나누어서 움직였고, 허헌 역시 경찰과 [[미군정]], 우익 청년단체원의 눈을 피해 밤중에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녀야 했다.
 
=== 남북협상 이후 ===
[[파일:허헌_박헌영_홍명희허헌 박헌영 홍명희.jpg|썸네일|250px|right|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 왼쪽부터 [[백남운]],허헌,[[박헌영]],[[홍명희]].]]
{{참고|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남로당]]의 [[리승엽]] 등과 함께 38선 이북으로 갔다가 내려오지 않았으며, 그해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정의 책임을 맡은 [[최고인민회의]] 헌법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정 후 [[9월]]에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동시에 그해 [[10월]]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직을 겸임하였다. 48년 7월 2일부터 7월 5일까지 열린 제2차 남북 지도자회의(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본회의에 참석했다.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에 당선되고, [[1951년]] [[8월]] 다시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1951년]]에 병사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같은 해 [[8월 16일]] [[청천강]]에서 사고로 익사하였다는 주장이 있다.<ref name="비전1">정경모, 찢겨진 산하 (기획출판 거름, 1986) 195페이지</ref> 장례식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장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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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 : 허선욱(許善旭, 음악가·[[하프]] 연주자, [[1935년]] [[3월 1일]] - )
** 아들 : 허영욱(許暎旭), [[1937년]] [[2월 9일]] - )
** 아들 : 허종욱(許鍾旭), [[193 년]] [[ ]] ~ 사망
** 아들 : 허성욱(許聖旭), [[1942년]] [[8월 2일]] - [[2013년]] [[2월10일]] )
** 아들 : 허기욱(許琦旭), [[1946년]] [[8월]] - )
 
211번째 줄:
</small>
 
==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