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마사유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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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anada Masayuki2.jpg|230px|thumb|사나다 마사유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1547년]]~[[1611년]])는 [[일본]] [[전국 시대]]와 [[에도 시대]] 초기에 활약한 [[센고쿠 다이묘]], 무장이다.
[[다케다 씨|다케다 가문]]에 항복한 [[시나노 국|시나노]]의 토착영주였던 [[사나다 씨|사나다 가문]] 출신이다. 신겐 시대에 다케다 가문을 섬기기 시작하였고, 다케다 가문 멸망 후에는 독립했다. 독립한 후 호죠 가문이나 도쿠가와 가문과 잦은 분쟁을 겪었지만, 도요토미 정권 아래에서 다이묘가 된다. 2차례의 [[우에다 전투]] 등으로 유명하며 후세 사람들에게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지장(知將), 모장(謀將)으로 알려졌고, 에도 시대의 서민문학인 강담(講談)이나 소설(小説)에도 자주 등장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아버지는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隆), 어머니는 사나다 가문의 가신 가문인 가와하라 가문 출신이다. 형으로 [[사나다 노부쓰나|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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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분]] 16년 (1547년), [[사나다 유키타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
에이로쿠 12년(1569년)에 호죠 가문과 싸운 [[미마세 고개 전투]]에서는 전령장교 역할을 맡는다. [[겐키]] 3년([[1572년]]) 신겐이 상락작전(다이묘가 군대를 이끌고 수도인 쿄토로 올라가는 것.
주군인 신겐의 뒤를 이어 다음 해인
=== 도요토미 정권 아래에서의 다이묘화(化) ===
다케다 가문 멸망으로부터 불과 2개월 후인 텐쇼 10년([[1582년]]) 6월,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비명횡사하자, 다케다 가문의 옛 영토는 권력의 공백 상태에 빠진다. 카이와 시나노를 아우르는 다케다 가문의 옛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 [[호죠 우지나오]] 등 주변의 쟁쟁한 다이묘들이 앞다투어 침공해와 거대한 분쟁이 발생했다(
그해에 마사유키는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었고, 가게카쓰의 인질이었던 마사유키의 차남 [[사나다 노부시게|노부시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질이 되었다. 마사유키는 다음 해인
=== 서군 참가와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정권 내부에서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하자, 전국적으로 서군에 속해있던 다이묘들에 대한 처분이 내려졌다. 서군에 속해있던 마사유키와 노부시게는 우에다 성의 영지를 몰수하고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처벌이 내려지지만, 동군에 속해있던 마사유키의 장남
== 인물 ==
히데요시는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1582년의 혼란기에 마사유키가 주인을 5번이나 바꾸면서 살아남은 것을 가리켜, “'''겉과 속이 다른 자'''”라고 평가했다. 이 말은 비겁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지혜를 높이 평가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마사유키는 시나노의 작은 영주에 불과했지만 쟁쟁한 대세력들 사이를 교묘하게 건너다니면서 끝내 가문을 지켜냈다. 에도시대의 작품인 《진무내전》([[1731년]]) 이래로 지금도 역사소설 따위에서 마사유키는 뛰어난 모장으로 묘사된다. 《진무내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두번이나 그에게 패배의 쓴잔을 맛보게 한 마사유키를 대단히 두려워하여, [[오사카 전투]] 때 사나다가 오사카 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에야스가 “아비 쪽 말이냐, 아들 쪽 말이냐?”라고 되물으면서 심하게 덜덜 떨었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실제로는 오사카 겨울 전투 때, 마사유키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또, 마사유키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이시다
== 함께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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