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율리오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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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선출===
1549년 11월 10일 교황 바오로 2세가 선종한 후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소집되었다. 콘클라베에 참석한 추기경 선거인단은 모두 48명이었으며, 세 분파로 나뉘어졌다나뉘었다. 첫 번째 파벌은 신성 로마 제국파 추기경들인데 이들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재소집을 바라고 있었으며, 반대로 프랑스파 추기경들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중단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전임 교황의 가문과 유착 관계인 파르네세파 추기경들은 신성 로마 제국과 경쟁 관계인 [[파르마 공국]]과 더불어 바오로 3세의 손자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을 차기 교황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프랑스파와 신성 로마 제국파 어느 쪽도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도 명시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차기 교황 후보 목록에서 그를 분명히 배제하였다. 하지만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의 자기 홍보로 프랑스파는 나머지 두 파벌을 차단하기 위해 그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결국 추기경들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져 1550년 2월 7일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ref>Richard P. McBrien, ''Lives of the Popes: The Pontiffs from St. Peter to Benedict XVI'', (HarperCollins, 2000), 283.</ref> 그의 교황 선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오타비오 파르네세]]는 즉시 파르마 공작의 지위를 보장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