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탄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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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날짜=2012-9-13}}
{{전쟁 정보
|분쟁=바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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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배경 ==
일본 제국은 서남태평양 지역으로의 확장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진기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대본영은 일찍이 전진기지로써 필리핀을 선정하고, 오랫동안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했는데, 그 시작이 바로 [[진주만 공격]]이다. 필리핀 침공과 진주만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닌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일본 제국의 강한 의지가 담겨있음을 알수 있다.
 
 
== 경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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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은 [[필리핀 전역#무지개 계획 (Plan Rainbow)|무지개 계획 (Plan Rainbow)]]를 고안했는데, 해안에서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방어함으로써 가능한 한 장시간 루존 섬을 2개 부대(북부 루존부대 지휘관: [[조나단 메이하우 웨인라이트 4세]] 중장, 남부 루존부대 지휘관: [[조지 M. 파커]] 중장)로 방어하고, 여의치 않으면 기존의 계획이던 War Plan Orange-3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즉, 최대한 비밀스럽고 빠르게 바탄 반도로 철수하여, 마닐라만을 결사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다. 원래의 War Plan Orange-3계획에 따르면 농성을 위한 최소 6개월치의 식량과 의약품 및 무기를 비축하도록 되어있었으나, 맥아더의 수정된 계획 War Plan Rainbow 5에 따라 해안선에서의 방어를 위해 물자들이 해안선 주변으로 넓게 퍼져 있었다. 따라서 바탄 반도에서의 농성을 위해서 비축하려 했던 6개월치의 보급품은 확보하지 못한채 바탄반도로의 철수가 이루어졌으며, 결국 이 보급품의 부족은 바탄 반도에 농성중인 미군의 발목을 잡게된다. '''일본군이 미-필리핀군의 바탄 반도로의 철수를 예측하지 못한 이유'''는, 미-필리핀군이 마닐라를 결사 항전의 의지로써 사수할 것이라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 일본군의 마닐라 무혈 입성 ===
[[일본 육군]]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있는 미-필리핀군이 바탄으로 철수하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채, 필리핀 외곽으로 진격하였으나 미-필리핀군의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자 당황하였지만, 소기의 목적인 마닐라 점령을 손쉽게 달성했다는 점에서 위안을 찾았다. 그러나, 아직 배후에 미군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일본군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으므로, 일본군은 미군을 필리핀에서 섬멸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적으로 일본군은 매우 열세였으므로, 일본군은 조직적인 포격과 집중 돌파 전술을 사용하여 미군의 저지선을 돌파할 생각이었다.
 
 
=== 미-필리핀군의 완강한 저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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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마 장군은 주 진지에서의 완강한 저항을 염두에 두고, 장기간의 포위 전략으로써 미-필리핀군을 굴복시키고자 하였으나, 대본영에서는 국내여론과 전쟁전반에 걸친 계획상의 차질을 우려하여 조기점령을 계속해서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정글을 통한 침투와 해안가를 통한 침투를 지속적으로 시도하였으나, 일본군은 번번히 패퇴하였다.
 
 
=== 예비 진지 저지선의 붕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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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차 50대
* 항공기 100대
 
 
4월 3일 조직적인 포격과 돌파 전술로 총공세를 시작한 일본군의 기세 앞에 미-필리핀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4월 9일 투항한 미-필리핀군과 생포된 패잔병을 포함한 약 75,000명의 병사들이 포로로써 바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약 10,000명의 병사와 20,000명의 병사가 죽거나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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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 ==
바탄 전투 결과, 일본은 필리핀을 완전하게 점령하였으며, 차기 작전을 위한 전진기지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탄 전투를 포함한 필리핀 전역에서 받은 인적, 물적, 시간적 손실은 뉴기니아와 솔로몬 전역에 대한 일본의 침공 계획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미군에 5개월이라는 시간을 준 셈이 되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