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 미쓰나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게이초 5년([[1600년]]) 음력 7월, 미쓰나리는 이에야스를 정계에서 배제하기 위해 [[아이즈]](현재의 [[후쿠시마 현]])의 대 다이묘 우에스기 가게카쓰, 그의 가신 [[나오에 가네쓰구]]와 비밀리에 거병계획을 꾸민다. 이에 관해서는 예초에 밀약같은 것은 없었다라는 설도 있다. 이 후, 우에스기 가문은 공공연히 이에야스와 대립하였고 가네쓰구는 [[나오에장]]을 전국에 반포하여 도쿠가와에 반기를 표하였고, 이에 이에야스는 여러 [[다이묘]]를 이끌로 [[아이즈 정벌]]을 단행한다. 지금이 동서로 이에야스를 협격할 호기로 본 미쓰나리는 거병을 결의하고, 이에야스에게 종군하려던 친우 오타니 요시쓰구를 우군을 맞이하였다. 요시쓰구는 당시 영지 19만 석에 불과한 미쓰나리가 250여만 석의 대 다이묘인 이에야스에게 대항하는 것은 무모하다며 말리지만, 도요토미 가문을 위한 미쓰나리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 미쓰나리의 서군에 가담한다.
 
음력 7월 12일 형 마사즈미를 부교로 하여 오미 [[에치 강]] 인근에 관소를 설치하고,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로 향하는 후발 다이묘 [[나베시마 가쓰시게]](鍋島勝茂)와 [[마에다 모리카쓰]]의 움직임을 저지하여 자군에 편입시켰다. 단, 나베시마 가쓰시게의 경우, 아버지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부터 오사카 저택에 머물러 있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수상히 여기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미쓰나리를 따랐다는 설도 있다. 음력 7월 13일 미쓰나리는 힘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여러 다이묘의 처자를 인질로 삼기 위해 [[오사카 성]] 안으로 군을 파견한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의 처를 비롯 일부는 이미 오사카를 탈출하였고, 더욱이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처 [[호소카와 가라샤]]는 저택에 불을 놓고 죽는다. 이에 다이묘들의 처를 인질로 삼으려는 계획은 중지되었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이러한 행동은 일본 전체를 분노에 휩쌓이게 했으며 이시다 미쓰나리는 공공의 적이 되었는데 특히 [[호소가와 다다오키]]는 이시다 미쓰나리를 찢어죽여버리기로 굳게 맹세했다.
 
음력 7월 17일 오대로 중 한명인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서군 총대장에 옹립해 오사카 성에 입성한다. 이와 관련하여 오타니 요시쓰구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인망이 높지 않음을 직언하여 보다 큰 다이묘에게 지휘권을 넘기라는 조언해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 역시 미쓰나리와 같이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위한 것이라고 했기에, 전쟁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히데요리의 참전을 이끌지는 못했다. 음력 7월 18일 서군은 이에야스의 중신 [[도리이 모토다다]]가 지키고 있는 후시미 성을 공략한다. 그러나 도리이 군의 완강한 저항에 쉽게 함락하지 못하자, 병사들의 가족을 인질로 협박하였고, 음력 8월 1일 협박에 못이긴 병사들의 배신으로 성은 함락된다. 음력 8월 2일 미쓰나리는 후시미 성 함락을 여러 다이묘에 알리기 위해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및 자신이 연판장에 이름을 올려 전국에 공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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