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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에 입성한 후 대명전(大明殿)에서 제왕과 백관들의 조하(朝賀)를 접수해 황제의 지위를 굳혔으며, 부왕 카말라를 현종(顯宗)이라 추존하고, 이듬해 연호를 태정(泰定)으로 개원하였다. 태정 원년([[1324년]]) 3월, 처(妻) 바부칸(八不罕)과 장남 아라기박을 각각 황후와 황태자에 책립시켰다. 태정 2년([[1325년]]) 7월, 한인들이 병장기를 휴대하거나 수장하는 행위를 금지시킨 명령이 반포되었고, 동년 9월엔 천하를 18도(道)로 구분짓는 행정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밖에 당대 중국에서 문제가 되었던 라마승 내지 도사들의 횡포를 견제하고자 토지 매입 단속과 요역을 부과하는 등의 시책도 내놓았지만, 효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태정 2년 6월, 하남행성의 식주(息州)에서 백성 조추시(趙醜廝)와 곽보살(郭菩薩) 등이 요언으로 '미륵불(彌勒佛)이 마땅히 천하를 가질 것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리자, 유사(有司)에서 소식을 듣고 그들을 체포해 국문하도록 명령한 사건이 발생했다. 금말원초(金末元初) 대란의 주요 전장인 하남은 전란이 수습된 후로도 황하의 잦은 범람과 원 왕조의 가렴주구 탓에 황폐해진피폐해진 상황이었는데, 이 미륵불 요언 사건은 하남의 불온했던 정세를 반영한 소동일 뿐만 아니라, 원말 민중봉기의 징후가 감지된 첫 신호탄이라는 해석도 제기된다. 훗날 미륵불 구원 사상을 기치로 내걸며 봉기한 백련교의 근거지가 바로 하남이었던 것이다.
 
재위 5년간의 치세는 원 중기의 혼란상 가운데 예외적인 안정기로 이렇다 할 정변은 없었다. 그러나, 몽골 본토와 영하(寧夏) ・강회(江淮) 일대에 천재지변이 빈발하여 민심이 동요했으며, 소수민족의 준동마저 지속되는 등 사회 저변의 모순이 심화되어갔다. 평장정사 장규(張珪)가 테그시 일당의 잔당을 처벌할 것과 궁중내 승려와 도사의 추방, 용관(冗官) 정리, 광동(廣東)에서의 진주(眞珠) 채취 중단을 골자로 한 시정 개혁안을 제출했으나,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장기간 북방에서 성장해왔기에 중앙 정계에 잘 적응하지 못한데다, 한지파(漢地派) 조신(朝臣)들과도 관계가 원만치 못했던 태정제는 제국의 통치권을 중서좌승상 다울라트 샤에게 일임한 것을 위시로 행정 ・감찰 ・군사 각 방면에 걸쳐 중용된 색목인 중심의 친신(親臣) 세력 배양과 몽골인 왕공귀족층에 대한 우대책에 힘입어 정권 기반을 유지하였다. 이는 [[아유르바르와다|인종]]과 영종대 한인 사대부의 성원을 받아 추진되어 온 유교적 이념에 부합된 지치신정(至治新政)을 부정함은 물론, 원 제국의 중국화와도 극명히 대비되는 보수 ・반동 노선으로 태정제 정권의 성격을 특징지은 대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