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시대 (중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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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의 강세 ===
191년, 연합군 사이에서는 황실의 친척이었던 [[유우 (후한)|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점점 연합군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몇몇 군주들을 제외한 나머지 연합군주들은 한나라의 재건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 강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결국 한나라는 군주들에 의해 나뉘었다. [[원소 (후한)|원소]]는 [[업 (
동탁은 [[여포]]와 사도 [[왕윤]]에게 살해당했다. 여포는 동탁의 부하들([[이각 (후한)|이각]], [[곽사]], [[장제 (후한)|장제]], [[번조]])에게 차례로 공격당했다. 왕윤과 그의 가족들은 전부 처형당했다. 여포는 잠시 [[장양 (치숙)|장양]]에게 몸을 위탁하다가 원소의 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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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에 유표를 상대로 승리하고, [[허공 (후한)|허공]]의 반란을 진압한 손책은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동생이었던 [[손권]]을 후계자에 임명했다.
조조는 [[관도 대전]]에서 원소와 충돌했다. 군사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승리했는데, 특히 원소의 군량창고에 불을 질러 군대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로 도망쳤고, 많은 원소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202년에, 조조는 원소의 죽음과 이후 원소의 아들들의 내분을 기회로 삼아 황하 북쪽으로 진격했다. 그는 204년에 [[업 (
=== 적벽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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