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의 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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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날짜=[[184년]]
|장소=[[유주 (중국)|유주]], [[청주 (중국)|청주]], [[영천시|영천]], [[곡양]], [[완성]]
|결과=황건의 난 진압, 그러나 [[후한]]의 쇠퇴
|교전국1=한나라 관군
황건적의 난은 [[후한]] 전국 13곳에서 일어나고 이에 [[후한]] [[황제]] [[영제]]는 외척이자 [[대장군]] [[하진]]과 대책을 의논한다. 이리하여 옛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과 [[황보숭]], [[주준]] 등 3명의 장수가 [[황건적]]과의 전투 부대로 편성되고 [[조조]]도 기도위에 임명되어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한편 [[강동 (중국)|강동]]의 [[손견]]도 [[하비]]에서 부하 [[황개]], [[한당]], [[정보 (후한)|정보]], [[조무]]와 함께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참여한다. 그리고 [[유주 (중국)|유주]]의 [[탁현]]에서는 [[유비]]가 [[장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집해 모집한 용사 500명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전쟁 정보
|설명=
|날짜=[[184년]]
|장소=[[후한]] [[유주 (중국)|유주]]
|결과=[[유언 (후한)|유언]]과 [[유비]]의 첫 승리
|교전국1=[[유언 (후한)|유언]] <br /> [[유비]]
 
=== 유주성 전투 ===
의병을 일으킨 [[유비]]는 [[유주성]]으로 가 [[유주 (중국)|유주]] 태수 [[유언 (후한)|유언]]을 만난다. 얼마 뒤 [[황건적]] 대장 [[정원지]]가 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비는 의병 500명을 이끌고 유주의 관군 대장 [[추정 (후한)|추정]]과 함께 유주성 앞 [[대흥산]]에서 대치한다.
 
정원지는 부장 [[등무]]를 내보내 맞서게 했으나 유비의 의형제 [[장비]]에 의해 베어진다. 이에 정원지는 직접 나서지만 오히려 유비의 의형제 [[관우]]에 의해 목이 베인다.
|설명=
|날짜=[[184년]]
|장소=[[후한]] [[청주 (중국)|청주]], [[유주 (중국)|유주]]
|결과=[[황건군]]의 패배
|교전국1=[[유언]]([[후한]]) <br /> [[유비]]([[촉한]]) <br /> [[공경]]
 
=== 청주성 전투 ===
유주성 전투 후 다음 날 황건적에게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한 [[청주 (중국)|청주]] 태수 [[공경]]의 편지가 도착한다. [[유주 (중국)|유주]] 태수 [[유언 (후한)|유언]]은 교위 [[추정 (후한)|추정]]을 시켜 군사 5000명을 보내 유비와 함께 청주의 황건적을 무찌르게 한다. 청주성에 도착한 유비는 황건적들을 끌어들여 계곡으로 유인한 뒤 무찌른다.
 
[[공경]]도 군사를 내어 황건적을 앞뒤로 포위해 무찌르고 유비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유비는 광종으로 [[노식]] 장군을 도우려 가지만 노식의 의견으로 1000명의 병사들을 내주어 [[황보숭]]과 [[주준]]을 도와주려 [[영천]]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