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35번째 줄:
 
== 결과 및 영향 ==
결국 조선군 7~8만 명은 겨우 1600명의 왜군에게 패배하였다. 선조도 "8만의 군마軍馬가 어찌해서 패배하게되었느냐"고 당시 8만 대군의 붕괴를 목격한 의병에게 말했다.<ref>선조 29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26일(계축) 1번째기사</ref> 조선군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대부분 도주하거나 일부 지휘관들만이 부대를 유지해서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대표적으로 광주 목사 [[권율]]은 휘하 부대를 수습하여 그 군사로 후에 [[이치 전투]]에서 승리했다. 궤멸된 조선군은 각지로 흩어져 재합류하거나 의병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로 이만한 규모로 조선군이 결집되지는 못하였다.
 
[[이광 (1541년)|이광]]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유배되었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황진]]만이 자신의 부대를 온전히 유지한채 퇴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