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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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 및 영향 ==
결국 조선군 7~8만 명은 겨우 1600명의 왜군에게 패배하였다. 선조도 "8만의 병마兵馬가 무슨 까닭으로 한번에 무너졌느냐"고 당시 삼도연합군 8만 대군의 붕괴를숫자와 그 붕괴 모습을 목격한 의병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의병은 신익이 여러차례 진을 옮기며 도망치고 백광언(白光彦)·이지시(李之詩)는 절도를 그르쳤기때문에 싸움에서 졌다고 말했다. <ref>선조 29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26일(계축) 1번째기사</ref> 조선군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대부분 도주하거나 일부 지휘관들만이 부대를 유지해서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대표적으로 광주 목사 [[권율]]은 휘하 부대를 수습하여 그 군사로 후에 [[이치 전투]]에서 승리했다. 궤멸된 조선군은 각지로 흩어져 재합류하거나 의병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로 이만한 규모로 조선군이 결집되지는 못하였다.
 
충청도순찰사 윤선각이 1만 5천 군사 중 8천의 근왕병만으로 이광,곽영과 함께 가고 나머지는 매복시키려했으나 <ref>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11번째기사 </ref> 어째서인지 당시 사관의 기록 기재사초 그리고 선조실록은 충청도 군사 1만 5천이 이광,곽영과 함께 용인에 주둔해 8만의 군세였다고 적고있다.
 
당시 사관의 기록인 기재사초에도 "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이 군사 8만을 거느리고 바로 서울로 향하였다."라고 적혀있다.
기재사초를 적은 사관은 용인에 진을 친 삼도연합 8만 대군의 위세에 적이 그 군세가 대단하여서 감히 나오지못했으나 이광이 군대를 양떼같이 몰고다니며
언덕 위의 적군의 목책과 집으로 무작정 돌격하다가 짙은 안개가 끼이고 적들의 조총 난사에 왜군 4~5천이 나아오자 8만의 군대가 잠깐동안에 다 흩어져버렸다고 적고있다.
8만 대군이 버리고간 궁시(弓矢)ㆍ도창(刀槍)ㆍ양자(糧資)ㆍ기계(器械)ㆍ의복(衣服)ㆍ장식(裝飾)이 낭자하게 버려져서 개울을 메우고 골짜기에 가득하여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산골짜기에 숨었던 촌민들이 밤을 틈타 주워 모아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여 산 자가 매우 많았다.
 
 
 
조선군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대부분 도주하거나 일부 지휘관들만이 부대를 유지해서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대표적으로 광주 목사 [[권율]]은 휘하 부대를 수습하여 그 군사로 후에 [[이치 전투]]에서 승리했다. 궤멸된 조선군은 각지로 흩어져 재합류하거나 의병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로 이만한 규모로 조선군이 결집되지는 못하였다.
 
[[이광 (1541년)|이광]]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유배되었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황진]]만이 자신의 부대를 온전히 유지한채 퇴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