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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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만 대군은 적의 칼날들에 도륙당해 모두 도주해 흩어진후 무수히 굶어죽어 3만만 남았다고한다.<ref>선조 140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8월 28일(계사) 2번째기사 </ref>
 
조선군의그러나 정확한 피해그러한건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대부분 도주하거나 일부 지휘관들만이 부대를 유지해서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대표적으로아니었으니 광주 목사 [[권율]]은 휘하 부대를 수습하여 그 군사로 후에 [[이치 전투]]에서 승리했다. 궤멸된 조선군은조선군 중에선 각지로 흩어져 재합류하거나 의병활동을 했던 것으로것들이 사료들에 나타나 보이지만 이후로 이만한8만, 10만만한 규모로 조선군이 결집되지는 못하였다.
 
[[이광 (1541년)|이광]]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고문을 당하고 유배되었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황진]]만이 자신의 부대를 온전히 유지한채 퇴각하게 되었다.
 
[[류성룡]]은 이 전투에 대하여 《[[징비록]]》을 통하여 '흡사 봄놀이 같았더라' 라고 힐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