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앙 (포르투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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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Rei dom sebastiao.jpg|thumb|250 px|right|세바스치앙세바스티앙 1세]]
'''세바스치앙세바스티앙 1세''' (Sebastiao I, [[1554년]] [[1월 20일]] - [[1578년]] [[8월 4일]]) 는 [[아비스 왕조]] [[포르투갈 왕국]]의 [[포르투갈 군주 목록|왕]] (재위: [[1557년]] - 1578년). 「대망왕」(o Desejado)으로 불린다.
 
[[죠안주앙 3세 (포르투갈왕)|죠안주앙 3세]]의 5남(제8자) [[죠안주앙 마누엘 데 포르트갈포르투갈|죠안주앙 마누엘]]과 [[스페인에스파냐 군주 목록|스페인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 (신성 로마 황제)|컬 5세]]) 의 딸 [[후아나 데 아우스트리아|후아나]]의 아이소생. 아버지 죠안주앙 마누엘의 어머니모친 [[카타리나 데 아우스트리아|카타리나]]는 카를로스 1세의 여동생, 어머니모친 후아나의 어머니모친 [[이자베라이자벨라포르트갈포르투갈|이사벨]]은 죠안주앙 3세의 여동생이며, 세바스치앙의세바스티앙의 부모님은 아버지부모는 쪽과부계와 외가의모계 쌍방에서 사촌남동생의사촌남매의 관계에 있었다.
==생애==
조부 죠안주앙 3세에는 많은 남자가아들이 있었지만, 세바스치앙의세바스티앙의 아버지부친 죠안주앙 마누엘도마누엘을 포함해 전원이 앞서가앞서 세바스치앙은사망해 아버지세바스티앙은 죠안이부친 잠긴주앙이 죽은 지 18일 후에 탄생했다탄생하였다<ref name="zusetsu53">금7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 53 페이지</ref>. 광장에 몰려든 군중에게 왕자의 탄생을 알게알렸을 되면, 군중은 왕자의 탄생에 환희해,환희하며 축복했다축복하였다<ref name="horupu">금7 「세바스치앙세바스티앙」 「세계 전기 대사전세계편」5권,437-439페이지</ref>. 후아나에후아나에게 남자가남아가 탄생하지 않으면, 스페인에스파냐 왕 [[훼리페펠리페 2세 (스페인왕에스파냐왕)|훼리페펠리페 2세]]의 왕자아들 [[카를로스 (아스트리아스공아스투리아스 공)|돈 카를로스]]에게 포르투갈 왕위가 옮길옮겨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세바스치앙의세바스티앙의 탄생은 국민으로부터국민에게 바람직해바람직하여 「대망왕」이라고 혼명되었다애칭되었다<ref name="zusetsu53"/>. 태어난 왕자는 1월 28일에28일 수세해영세하여, 생일의 성인 [[세바스티아누스]]를 기념하여 세바스치앙이라고세바스티앙이라고 명명되었다<ref name="horupu"/>. 세바스치앙의세바스티앙의 탄생으로부터 4개월 후, 어머니의모후 후아나는 약혼시의 결정에 따라서따라 모국의모국 [[스페인에스파냐]] 돌아왔다돌아갔다<ref name="horupu"/>.
 
[[1557년]]에 죠안주앙 3세가 잠긴승하한 후에 세바스치앙이세바스티앙이 3세에3세의 즉위해나이로 즉위, 조모 카타리나가 섭정으로서 세바스치앙을세바스티앙을 후견했다후견하였다. [[1562년]]으로부터 [[1568년]]까지는 대숙부의대숙부인 추추기경추기경 [[엔리케엔히크 1세 (포르투갈 왕)|돈 엔리케엔히크]]가 섭정을 맡았다. 1562년에 소집된 [[콜테스코르테스 (신분제 의회)|콜테스코르테스]]는 세바스치앙에게세바스티앙에게 결혼을 요청해요청, 백부인 스페인에스파냐 왕 [[훼리페펠리페 2세 (스페인에스파냐 왕)|훼리페펠리페 2세]]의 왕녀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에게와의 약혼이 결정되었다<ref name="abe139">아베 「파란만장의 포르투갈사」, 139페이지</ref>.
 
담력이담력 있어있고, 모험심이 풍부하고풍부했기 있던때문에 것으로부터 세바스치앙은세바스티앙은 「기사왕」이라고도 혼명된다불린다<ref name="abe136">아베 「파란만장의 포르투갈사」, 136페이지</ref>. 그러나, 정서정서가 불안정하고 허영심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여, 타인의 의견을 거의 들어주지경청하지 않았다<ref name="zusetsu53"/>. 자신에게 아첨해, 형편의듣기 좋은 의견을 말하는 인물만인물에게만 친밀감이 있는친밀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보였다<ref name="horupu37">말케스마르케스 「포르투갈」2, 37 페이지</ref>. 11세 때에 [[바타랴바탈랴]]를 방문한 세바스치앙은세바스티앙은 [[죠안주앙 2세 (포르투갈왕)|죠안주앙 2세]]의 무덤을 파내,파내고 사체를 세워 놓고는 「그야말로 왕의 책무를 가장 잘 완수한 인물이다」라고 했다말하였다<ref name="abe136"/>.
 
세바스치앙은세바스티앙은 수렵과 승마에 빠져 국정에게는국정에는 관심을 나타내지기울이지 않고않아, 정무의 실권은 엔리케로부터엔히크 둘러싸들로추기경과 그 측근들에게로 옮겨 갔다<ref name="horupu"/>. 가정교사인 [[예수회|예수회자]]의 카마라 신부, 아시아 · 아프리카를 전전한 경력이 있는 부적역의 돈 아레이죠는 세바스치앙에게세바스티앙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ref name="horupu"/>. 14세가 된 세바스치앙은세바스티앙은 친정을 실시하지만, 유소기부터유소년기부터 전쟁과 종교에 이상이라고도이상할 말할 수 있는정도의 흥미를 나타내고보이고 있었다<ref name="zusetsu53"/>. 조부에게조부인 죠안주앙 3세와 카를로스 1세, 백부에게백부인 훼리페펠리페 2세라는 유럽의유럽 대국의 군주를군주들을 척에탓에 가지는 세바스치앙은세바스티앙은 자기 자신도 위대한 왕이 되는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어믿으며 성장해 갔다성장해갔다<ref name="horupu"/>.
 
해를 거치는 것에거침에 따라, 세바스치앙세바스티앙의 중에서는내면에는 [[십자군]]을 실시하는실시하고자 하는 소망이 강해져 갔다<ref>금7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53-54페이지</ref>. 죠안주앙 3세는 고액의 유지· 방위비를 필요로 하는 [[모로코]]의 도시의도시 대부분을 방폐했지만방폐하였지만, 세바스치앙은세바스티앙은 이러한 도시의도시들의 회복을 바랐다<ref name="horupu"/>. 세바스치앙이세바스티앙이 세운 원정의 구상은 대담하지만대담하였지만 계획, 전략, 퇴각에 대해서는 고려되지 않고, 그는 그러한 요소를요소들을 겁쟁이의 생각이라 일축했다일축하였다<ref name="horupu37"/>. 전비를 염출염출하기 하기 위해서위하여 국민과 교회에 무거운 부담이 지워지자, 외국의 상인으로부터외국상인들으로부터 고액의 군자금을 차입했다차입하였다<ref name="horupu37"/>. [[1574년]]에 세바스치앙은세바스티앙은 [[사아드아침사아드 아킴]] 지배하의 [[모로코]]에 처음으로 상륙해, 3개월 사이3개월간 머물었지만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다<ref name="horupu37"/>. 귀국후에귀국후 세바스치앙은세바스티앙은 원정의 준비를 재개해, 백부 훼리페펠리페 2세에 지원을 요구했지만요구하였지만, 원조는 얻을 수 없었다. 세바스치앙과세바스티앙과 회견한 훼리페는펠리페는 원정의 결과를 불안시해불안하게 여기어, 일찌기일찍이 결정한 결혼의 연기를 신청했다요청하였다<ref name="abe139"/>.
 
[[아브 마르원마르완 아브드압드 알마리크알 마리크 1세]]에 의해서 모로코의 왕위를 쫓긴빼앗긴 [[아브 아브두라압둘라 무하마드 2세|무레이 무하마드]]가 포르투갈에 지원을 요구했을 때요청하자, 1578년 여름에여름 세바스치앙은세바스티앙은 용병을 포함한 약 15,000의000명의 병사를 인솔해 다시 모로코에 상륙한다. 세바스치앙의세바스티앙의 군대는 통제를 취할 수 없고, 규율이 부족했다부족하였다<ref name="horupu38">말케스마르케스 「포르투갈」2, 38 페이지</ref>. 1578년 8월 4일에 [[아르카셀알 카세르 키비르 전쟁전투]]으로 포르투갈군은 이스람군과이슬람군과 교전해, 포르투갈 사상 최대의 참패를 당했다당하였다<ref name="horupu38"/><ref name="zusetsu54">금7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 54 페이지</ref>. 세바스치앙은세바스티앙은 전사했지만전사하였지만, 사체는 발견되지 않았다<ref name="zusetsu54"/>. 모로코 원정에 필요로 한소요된 전비는 세입의 반에 이르러, 국가는 다대한막대한 손실을 입었다<ref name="horupu38"/><ref name="zusetsu54"/>. 또, 세바스치앙은세바스티앙은 24세의 젊음으로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왕비 후보자를 죄다 치워모두 왔기거절해왔기 때문에, 적자는 없었다<ref name="zusetsu54"/>.
==정책==
세바스치앙세바스티앙 1세가 친정을 맡고 있던 기간의 대부분은대부분, 포르투갈 국내는 안정된 상태에 있어, 대규모 정치 개혁은 행해지지 않았다<ref name="horupu37"/>. 신앙 · 교회에 관련하는 법령이 많이 제정되어 포르투갈 본토와 식민지의 새로운 [[주교구교구]]의 설치, 종교재판소의 권한의 강화 등이 실시되었다.
 
죠안주앙 3세가 잠겨승하하여 세바스치앙이세바스티앙이 즉위한 후도,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는 확대를확장을 계속했다지속하였다<ref name="abe136"/>. [[1559년]]에 포르투갈군은 인도 서해안의 [[다만]]의 재정복에 성공한다. 1567년에 브라질 총독 Mem de Sa가 남아메리카의 리오리우자네이로만에서자네이루 만에서 [[프랑스 왕국|프랑스]]군을 격퇴해격퇴, 요새를 점령한다. 요새는 코로식민지로 니어(식민지구)에 다시 만들 수 있어재건되어 후의 [[리오데자네이로리유 데 자네이루]]로 발전한다. 1570년에는 [[앙골라]]의 식민지화를 개시했다개시하였다. 1562년에 모로코, [[1570년]]에 인도의[[고어주|고어고아]], [[체울]]이 공격을 받지만, 방위에 성공했다성공하였다.
==세바스치앙세바스티앙 주의==
[[1580년]]으로부터 포르투갈은 스페인의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놓여져 곤궁한곤궁해진 민중은 구세주의 출현을 열망하고 있었다<ref name="zusetsu57">금7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 57 페이지</ref>. [[1530년]]에 신발가게의신발 가게의 반다라가 쓴 숨은 왕이 민중을 해방하는해방한다는 예언시에 세바스치앙을세바스티앙을 적용시켜 세바스치앙은세바스티앙은 전사하고 있지 않고, 패배를 송구스럽게수치스럽게 여겨여기어 모습을 숨기고감추고 있다고 믿게 된다. 민중은 세바스치앙의세바스티앙의 귀국을 믿어 각지에 세바스치앙을세바스티앙을 사칭하는 사람이자들이 대부분다수 나타났다<ref name="zusetsu57"/>.
 
[[세바스치앙세바스티앙 주의]](메시아 대망론)는 스페인에스파냐 지배를 끝내는 민중의 반란의 원동력이 되어, [[브라간사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다<ref name="zusetsu57"/>.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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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아베 신온 「파란만장의 포르투갈사」(태류추천도서, 태류사, 1994년 7월)
* 금7기남 「세바스치앙세바스티앙」 「세계 전기 대사전세계편」5권수록(구오바라 다케오편, 호루푸출판, 1980년 12월)
* 금7기남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올빼미의 책, 카와이데 쇼보 신사, 2011년 5월)
* A. H. 데 오리비에라올리베라 말케스마르케스 「포르투갈」2(금7기남 역, 세계의 교과서=역사, 호루푸출판, 1981년 11월)
{{토막글|역사}}
[[분류:포르투갈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