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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군은 스스로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를 칭하고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조정은 지후(祗候) 채원부(蔡元富)와 낭장(郞將) 박강수(朴剛壽) 등을 보내 회유했으나[宣諭] 봉기군이 응하지 않자
명종 6년 2월에 장사(壯士) 3,000명을 불러 모으고 대장군(大將軍) 정황재(丁黃載)와 장군(將軍) 장박인(張博仁) 등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하지만 쉽게 토벌되지 않았다. 오히려 봉기군의 위세가 커져 [[예산군|예산현]]까지 봉기군이 공격하였다.<ref name="고려사절요1"><<http://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itemIds=&indexSearch=N&codeIds=PERIOD-0-3&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B%A7%9D%EC%86%8C%EC%9D%B4&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Detail/kj/kj_012r_0010_0070_0010_0020/1506057/0/3 고려사절요 명종 6년 1월 >></ref>
 
조정은 봉기군의 기세가 커지자 [[1177년]] 6월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하고 수령을 보내는 등 회유하였다.<ref name="고려사절요2"><< http://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itemIds=&indexSearch=N&codeIds=PERIOD-0-3&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B6%A9%EC%88%9C%ED%98%84&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Detail/kj/kj_012r_0010_0070_0050_0010/1426687/0/2 고려사절요 명종 6년 6월 </ref>
결국 봉기군은 고려 명종 7년 정월에 관군의 진압에 항복했다.조정에서는 창고의 곡식을 하사하여 민심을 달래고 감찰어사(監察御史) 김덕강(金德剛) 에게 명하여 그들의 고향으로 압송하였다.<ref name="고려사절요 3"><<http://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itemIds=&indexSearch=N&codeIds=PERIOD-0-3&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B%A7%9D%EC%86%8C%EC%9D%B4&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Detail/kj/kj_012r_0010_0080_0010_0010/1506057/1/3 고려사절요 명종 7년 1월 >></ref>
 
하지만 조정에서는 군사를 보내 주동자들을 잡아 가두려 하는 등 비열한 처사를 보이자 그해 2월 재봉기하였다. 지배계급만을 대변하던 절인, [[예산군|예산현]] 덕산에 소재한 [[가야사]](倻倻寺)와 직산에 있는 홍경원(弘慶院)을 불태우고 홍경원에 기거하던 승려 10여 명을 죽였으며, 홍경원의 주지를 협박하여 주장을 담은 글을 가지고 개경으로 가게 하였다. 그 글에서 이르기를, "이미 우리 고을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수령을 두어 위로하다가 다시 군사를 보내 우리 어머니와 처를 붙잡아 가두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창칼 아래 죽을지언정 항복하여 포로는 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왕경(王京, 고려 수도)에 쳐들어가고야 말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후 봉기군은 [[아산시|아주]]와 [[청주시|청주목]]을 공격했다. 고려 조정은 충순현을 명학소로 재강등하고<ref name="고려사절요 4"><< http://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itemIds=&indexSearch=N&codeIds=PERIOD-0-3&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B6%A9%EC%88%9C%ED%98%84&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Detail/kj/kj_012r_0010_0080_0050_0020/1426687/1/2 고려사절요 명종 7년 5월 >></ref>대규모 관군을 동원해 봉기군을 맹렬히 총공격하였다. 이때는 농번기라 봉기군 중 농민병이 이탈하고 식량과 무기가 매우 부족하여 정세가 불리해졌다. 결국 망이와 망소이를 위시한 봉기군들은 체포되고 봉기는 7월에 진압당했다.
 
망이와 망소이의 봉기가 시작되었던 명학소 위치는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당시 공주군 유성현)으로 추정되어 탄방동 1084번지 남선봉에 소재한 남선근린공원에 기념탑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