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요시히사 (1533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 요시히사는 [[에도 시대]] 초기에 고쿠부 지방에서 [[담배]]의 생산을 격려하였다고 한다(《大日本農功伝》등). 남규슈는 빈곤한 고장으로 환금성이 높은 농산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담배의 수입은 이후 [[사쓰마 번]](薩摩藩)의 귀중한 수입원이 되었다.
* 스스로를 훈계하기 위하여 침실에 역사상 희대의 악인의 초상을 걸어두고 자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는 습관이 있었다. 후세의 미국의 해군 원수 [[니미츠]]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서는 드물게도 요시히사 본인의 당시의 초상화가 남아 있지 않아 용모에 관해서는 불명이지만, [[가고시마 현}]] [[사쓰마센다이 시]](薩摩川内市)의 다이헤이지(泰平寺)에 후세에 만들어진 요시히사 항복 동상이 있다.
* 요시히사는 지용에 뛰어났을 뿐만아니라, [[호소카와 후지타카|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斎, 본명은 후지타카)로부터 [[고킨와카슈|고킨슈]](古今集)를 전수받거나, [[간파쿠]]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등과 친분이 두터웠던 등, 교양인이기도 했다고 한다.
* 덴쇼 14년([[1586년]]), 요시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친서를 받아 [[오토모 소린]]과 화의를 맺고 도요토미 가문에 신종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1월 11일에 호소카와 유사이 앞으로 화의와 신종을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다. 이 내용은 히데요시의 출신이 미천함을 심하게 지적하는 내용이어서<ref>「この御返書、関白殿へにて候へば、勿論その通りに相応の御請けをなすべく候。さりながら羽柴事は、寔に由来なき仁と世上沙汰候。当家の事は、頼朝已来愁変なき御家の事に候。しかるに羽柴へ、関白殿あつかいの返書は笑止の由どもに候。また、右の如きの故なき仁に関白を御免の事、ただ綸言の軽きにてこそ候へ。何様に敬はれ候ても苦しかるまじきよし、申す人も候。(이하 생략)」(《우와이카쿠켄 일기(上井覚兼日記)》, 《시마즈 가 문서(島津家文書)》3-1436 등에 수록되어 있다)</ref>, 그 후 시마즈 가문을 대하는 히데요시의 심증을 굉장히 해쳤을 가능성이 있다<ref>미키 야스시(三木靖), 《사쓰마 시마즈 씨(薩摩島津氏)》,(《戦国史叢書》10), 新人物往来社.</ref>.
* 오키타나와테 전투와 분고 침공전 등으로 출진할 때, 제비를 뽑아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 특히 분고 침공전에 대해서는 몇 번이나 제비를 뽑았기 때문에, 가신 우와이 가쿠겐도 일기 등에서 한탄하고 있다. 후세의 저작이나 학자에게도 이 점은 ‘우유부단’하다고 비판받는 경우가 많다. 단, 제비로 길흉을 점치는 것은 요시히사 뿐만아니라, 부친 다카히사를 비롯한 다른 센고쿠 다이묘도 했던 일이기 때문에, 이 점만을 가지고 우유부단하고 단정하는 것은 의문점이 있다. 또한, 분고 침공전 때 몇 번이나 제비를 뽑은 것은 이 싸움에 의해 도요토미 정권과의 전면충돌하게 되는 것을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지적도 있다.<ref>미키 야스시(三木靖), 《사쓰마 시마즈 씨(薩摩島津氏)》,(《戦国史叢書》10), 新人物往来社. 등</ref>
 
== 사세구(辞世の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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