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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탁'''(禹倬, [[1263년]] ~ [[1342년]])은 [[고려]] 충선왕후기의 때의 성리학자이다문신이다. 본관은 [[단양 우씨|단양]],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 호는 역동백운(易東白雲)·단암(丹巖)이다. [[단양 우씨]] 시조 우현(禹玄)의 7대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우천규(禹天珪)의 아들이다.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있을 때 요신(妖神)의 신사를 철폐하였다.
일찍이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있을 때 요신(妖神)의 사당을 철폐한 적이 있었고 [[원나라]]를 통해 정주의 역전(易傳)을 연구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명승지로 [[단양팔경|단양 팔경]]의 하나인 사인암(舍人巖)은 그가 고려 말기에 사인 벼슬로 있을 때 그곳에 휴양을 가서 이름이 붙여졌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원나라]]를 통해 정주의 역전(易傳)을 연구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고려사』 열전에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뛰어난 역학자였다.
 
일찍이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있을 때 요신(妖神)의 사당을 철폐한 적이 있었고 [[원나라]]를 통해 정주의 역전(易傳)을 연구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명승지로 [[단양팔경|단양 팔경]]의 하나인 사인암(舍人巖)은 그가 고려 말기에 사인 벼슬로 있을 때 그곳에 휴양을 가서 이름이 붙여졌다.
 
1570년(선조 3) 이황(李滉)의 발의로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었다.
 
==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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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263년 태어남]]
[[분류:1342년 죽음]]
[[분류:고려의 문신]]
[[분류:고려의 정치인]]
[[분류:고려의 유학자]]
[[분류:단양 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