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겐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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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3월 [[도쿄 대학|도쿄 제국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5월 [[일본공산당]]에 공식 입당한다. 겐지는 [[1933년]] 일본 군경에 의해 체포되어 경찰관들을 죽이자고 선동한 혐의로 구속됐지만 그는 이를 부인했다. 이후 유죄판결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 후 석방됐다. 이후 다시 정계에 뛰어들어 [[1949년]]의 선거에서 일본공산당을 이끌었으며 이로 인해 일본공산당은 35석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더글러스 맥아더]]는 겐지와 23명의 다른 일본공산당 고위직 인사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1958년]] 일본공산당의 당수가 된다. 그 해 겐지는 공식적으로 일본에서의 폭력 공산 혁명을 요구하던 과거의 노선을 포기하고 겐지와 일본공산당은 온건노선을 취하기 시작했다. 미야모토 겐지 하에서의 일본공산당은 주거 문제, [[인플레이션]], 그리고 [[교육]] 문제 등을 이슈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겐지는 [[무산계급독재]]의 노선 대신 [[민주주의]]와 [[자유]]를 옹호하는 노선을 취하며 [[1977년]]까지 당수를 지냈다. 현재의 일본공산당 또한 이 노선을 따른다. 일본공산당 당수로서의 활동 이외에도 그는 정치에 대한 독자적 노선과 시선으로 알려져있다. [[1966년]]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한 이후 [[문화 대혁명]]을 '비정상적'이라 표현했으며 [[1968년]] [[소련]]의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대한 노골적 비판도 주목을 받았다. 반면에 강력한 [[미일 관계|미일 동맹]]에 반대하기도 했다. [[동구권]]의 [[공산주의]] 몰락에 대해 [[사회주의]]가 아니라 [[스탈린주의]]와 [[소련]]을 등에 업은 ([[동구권]])정부들의 실패라고실패’라고 했다.

일본공산당 당수를 그만 두고 나서도 일본공산당 활동을 활발히 벌였으며 [[1997년]]부터 [[2007년]] 도쿄의 한 [[병원]]에서 폐기종으로[[폐기종]]으로 사망할 때까지 명예 당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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