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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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新春文藝)는 [[대한민국]]에서 일간 [[신문]]사가 주관하여 [[신정|새해]]를 맞이해, 상금을 걸고 문학 작품을 공개 모집하여 새내기 [[문학]] 작가를 등단시키는 제도이다.
 
공모 분야는 [[소설]], [[시 (문학)|시]], [[동시]], [[시조]], [[희곡]], [[동화]], [[평론]] 등이며, 매년 [[1월 1일]]자 일간 신문 지면에 당선자를 발표하고 당선작을 싣는다.<ref> 《중앙일보》는 신춘문예 명칭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바꾸고 신문사 창간일인 9월 22일에 발표한다. </ref>
 
==초기의 신춘문예==
발상지는 [[일본]]이다.<ref name="ReferenceA">[[한겨레신문]], [[2015년]] [[1월 2일]] 신춘문예 100년과 <한겨레></ref> 한국에서 처음으로 신춘문예가 선보인 때는 [[1915년]] [[매일신보]]였다.<ref>[[한겨레신문]], [[2015년]] [[1월 2일]] 신춘문예 100년과 <한겨레><name="ReferenceA"/ref> [[매일신보]]는 [[1914년]] 12월 10일치 3면 중앙에 '신년문예모집' 공고를 냈다. [[1920년]]부터 '신춘문예'라는 용어가 나타났고, [[동아일보]]는 [[1925년]], [[조선일보]]는 [[1928년]]에 각각 신춘문예를 시행하기 시작했다.<ref name="한국최초"> {{서적 인용
|저자=김은신
|제목=이것이 한국 최초
|꺾쇠표=예
|발행일자날짜=1995-11-01
|출판사=삼문
|ID=ISBN 9788985407359
|쪽=30~32쪽
}} </ref>
 
처음에는 주제가 있었으며, 반드시 본격 문예 작품에 한정하지 않았다. 주제가 여럿이면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썼다. 순한글로 쓰되 1행 14자로 200행 이내로 분량이 정해져 있었다. 이는 오늘날의 200자 원고지 20매 이내였다. 원고에는 주소와 씨명(성명)을 명기하고, 겉봉에는 ‘신춘문예계’라고 붉은 글씨로 써야 했는데, 이 붉은 글씨 표시는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투고한 원고는 되돌려주지 않았다.
 
또한 1928년에는 현상금 대신 ‘박사 진정’(薄謝進呈, 사례로서 얼마 안 되는 돈이나 물품을 준다)이라고 했으나, 이듬해부터, 소설의 경우 1등에게는 60원, 2등에게는 30원을 주었는데, 당시 쌀 중급품 한 가마가 30원, 택시 요금이 1원(균일가)이었다. 첫해에는 4편의 소설체와 8편의 시가체가 뽑혔다. 첫해 주제가 ‘싸움 이야기’와 ‘용 이야기’였는데, 싸움 이야기를 택한 3개 작품 중 한 작품은 전면 삭제를 당했다. 당시의 작가와 작품명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배일(排日) 작품이라서 검열에 걸렸기 때문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