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포천-의정부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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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준비 ==
=== 한국군 ===
1950년 6월에 사단으로 승격된 제7사단은 곧바로 [[의정부]]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예하에 제1 · 3 · 9연대와 포병 및 공병 등을 합하여 총병력이 9,698명이었다. 그런데 전쟁 발발 3주전인 6월 1일로 육군본부에서 일선 명령 제43호를 하달하여 일부부대의 예 · 배속 관계를 조정함에 따라, [[이상근]]이 이끄는 제3연대가 수도경비사 산하로 예속이 변경됨으로써, 동 연대의 3,050명이 사단을 떠나고, 이날부로 제 1 · 9 양 연대와 포병 및 공병 등, 6,788명의 공력이 이 지역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6월 13일 육본 작전명령 제79호에 의거하여 [[6월 15일]]부로 [[김병휘]]가 이끄는 제2사단 제25연대가 제7사단에 편입되도록 예정되어 있었으나, 동 연대는 [[온양]]에 위치한 까닭에 의정부로 이동키 위하여 준비하던 바, 주둔지로 선정된 호완리 일대가 민유지였기 때문에 그 징발문제와 막사 및 식수문제 등 일련의 사정으로 말미암아 7월 15일로 이동일자를 연기한 차에 전투에 임하게 되었고 따라서 동 연대는 전투 후에 다시 제2사단에 복귀되었다.
 
제7사단이 방어임무를 맡은 곳은 서쪽부터 동쪽으로 [[적성면 (파주시)|적성면]]~[[쇄역리]]~[[일동면]] 사직리 간의 47km에 달하는 광정면(廣正面)이었다. 그리하여 제7사단은 [[유재흥]] 준장의 지휘 하에 예비대가 없이 양 연대를 일선에 내세웠다. 즉, 제1연대(연대장 [[함준호]] 대령)는 [[동두천]] 정면인 좌 일선을, 제9연대(연대장 [[윤춘근]] 중령)는 [[포천]] 정면인 우 일선을 각각 담당하였고, 38도 분계선 방어와 부대교육을 병행 실시하였다. 육군본부에서 교육각서 제 2호에 따른 교육을 실시케 함으로써일선 경비보다도 교육훈련에 더욱 치중하여, 38도 분계선 남연의 전진진지에 1/3 병력만을 배치하고 주력은 28km28 km 후방의 의정부 부근으로 집결시켜 대대급 이하의 기초훈련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각 연대로 하여금 1개 대대를 경계진지에 배치하고 2개 대대를 의정부 부근으로 뽑아 소정의 교육을 실시케 하되, 3개월마다 순환교대 방식으로 전술을 숙달하게 하였던 것이다.따라서 각 연대의 지휘소도 주력과 함께 모두 의정부 부근에 위치하고, 일선대대는 각각 20km20 km 내외의 광정면을 경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제7사단의 동반부인 [[포천]] 지역은 [[윤춘근]] 중령이 지휘하는 제9연대가 맡아 [[창수면]] [[추동리]] ~ [[일동면]] [[사직리]] 간의 26km에 달하는 책임지역을 방어하게 되었는데, 본래 이 지역은 [[김화읍 (철원군)|김화]]에서 [[영북면]] [[운천리]]와 [[포천]]을 거쳐서 의정부에 이르는 [[국도 제43호선]]([[호국로 (경기도)|호국로]])을 중앙에 끼고 동측의 [[광주산맥]]과 서측의 [[천보산맥]]이 종으로 뻗어 장방구형을 이룬 지대로써 정상적으로는 2개 사단의 방어정면에 해당될 것이다.
 
이러한 전투정면을 3,400명의 병력을 보유한 제9연대가 전담하여 북한군 제109전차연대와 협동으로 침공한 제3사단과 대결케 되었는데, 당시에 연대는 사단의 방침에 따라 1개 대대로써 일선경비를 담당하게 하고 2개 대대를 38도 분계선에서 26km26 km 뒤에 떨어진 양주군 의정부읍 [[금오동|금오리]]의 연대 지휘소 부근으로 뽑아 소부대 전술교육을 실시하던 상태였다.
 
따라서 일선경비를 맡은 대대는 전(全)정면배치가 곤란하여 통행의 요로만을 한정하여 거점방어태세를 취하였으니, 이날 제 1선에는 [[전순기]] 소령이 지휘하는 제2대대가 발발 이틀 전인 6월 23일부로 [[이철원]]이 이끄는 제3대대의 진지를 인수하여, 대대본부를 전과 다름없이 [[포천]]에 두고 [[송영환]]이 이끄는 제7중대를 오른쪽 제 1선으로 하여 [[국도 제43호선]]과 38도선이 교차하는 [[영중면]] [[양문리]] 일대에, [[이인호]]가 이끄는 제6중대는 왼쪽 제1선으로 제7중대의 서쪽의 소로인 지방도 제325호선(가영로)이 영평천에 이르는 [[창수면]] [[가양리]] · [[추동리]] 부근에 각각 배치하는 한편 제5중대는 예비로 4km4 km 후방의 [[신북면 (포천시)|신북면]] [[신평리]](만세교 서쪽) 부근에 공치하였다.
 
이렇게 볼 때, 대대의 실 병력이 배치된 지역은 6km의 점령지대에 불과하며 그 나머지 19km에 해당하는 산록과 야지는 거의 무방비상태로 있었으며 특히 동측의 [[일동면]] 기산리 북쪽은 [[지방도 제387호선]] 연변에서 1개 분대의 수색대가 봉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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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전쟁 발발 2주 전인 6월 10일에 [[평양]]의 민족보위성에서 비밀리에 군사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기동훈련을 빙자한 전투 병력의 일선전개를 꾀하였는데, 이때에 벌써 이들은 주력의 침공경로를 [[철원]]-[[연천]]-[[동두천]]-[[의정부]] 축선으로 결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그 회의 직후에, 제1군단(군단장 김웅 중장)은 평강 부근에 지휘소를 개설하였다.(6월 12일) 이때에 북한군은 기동훈련을 빙자한 전투전개를 꾀하였다. 김웅 중장은 평강으로 나와 중서부전선의 작전을 지도하였다. 제1군단 휘하의 4개 보병사단과 1개 전투여단으로 서울 공략을 획책했다. 특히 제3 · 4 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공격집단으로 묶어 집중적으로 의정부 정면으로 꿰뚫고자 하였다. <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17쪽. <!-- 본전투의 집결지인 평강부근에 북괴 제1군단의 지휘소가 개설된 것은 6월 12일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에 적은 기동훈련을 빙자한 전투전개를 꾀하였는데, 이 무렵 ??군단장 중장 김웅은 평강으로 나와 중서부전선의 작전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미 민족보위성의 훈련국장을 지낸 자로서 이번 전투에 주역을 맡아 휘하의 4개 보병사단과 1개 전투여단으로 서울 공략을 획책하였는데, 그 가운데 제3, 제4 양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공격집단으로 묶어 집중적으로 의정부 정면을 천관(穿貫)하려는 듯 하였다. --></ref> 단행된 병력의 이동상황으로 볼 때, 이른바 그들의 정예라고 하는 제3, 4 양 사단과 유일한 기갑부대인 제105기갑여단을 [[철원]]-[[포천군]] [[영북면]] [[운천리]]-[[연천]] 부근에 집결시켜 경원선 주변에서 공격태세를 갖추게 한 점과 전쟁 중에 입수한 노획문서 가운데 [[연천]]-[[의정부]]를 거쳐 조기에 [[서울]]을 점령한다고 밝혀진 점, 그리고 개전 이후의 부대기동 등을 종합하여 판단할 때, 그들의 침공기도는 처음부터 주력으로써 의정부로 지향한다는 계책을 세운 것으로 추단된다.
 
즉, [[김웅 (군인)|김웅]]이 이끄는 제1군단 예하의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으로 의정부 정면을 집중 공격하는 동시에, 동측의 [[김광협]]이 이끄는 제2군단과 서측의 제1, 6 양 사단과의 협조아래 수도 서울을 침탈 도모코자 하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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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당 사단의 책임지역이 그 주목표로 부상하게 되었거니와, 이들은 다시 구체적인 시행방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동월 18일부로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명의로 된 정찰명령 제 1호를 하달하였는데, 그 개요를 보면, 소대군위 이하의 병력 배치선 까지 정찰토록 하는 세밀한 계획을 세워 특히 유개진지와 병력배치상황 그리고 장애물 지대 및 예상 집결지 등을 확인토록 하였으며, 여기에 이어 공격목표의 선정과 부대의 기동계획을 마련토록 명시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정찰을 마친 그들은 6월 22일 14:00부로 전투명령 제 1호를 하달하여 23일 12:00까지 모든 공격준비를 완료토록 촉구하였다.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은 사단의 경계진지와 주진지를 빠짐없이 공격목표로 선정한 점과 포병을 비롯한 공병과 반전차포 및 항공등의 지원 아래 서울까지 일거공략 하려는 계획을 미리 밝히고 있는 점이다. 제3사단(사단장, 소장 이영호)은 포천 북쪽의 [[영중면]] 영평천 부근으로 나와, 제7연대(장, 대좌 김창봉)와 제9연대(장, 대좌 김만익)을 좌우 일선에 두고 제8연대(장, 중좌 김병종)을 예비로 보유하였으며 제3사단의 포병연대(장, 대좌 안백성)는 유정리(楡亭里) 부근에서 지원태세를 갖추었다. <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18쪽. <!-- 제3사단은 소장 이영호의 지휘 아래 포천 북쪽의 영평천 부근으로 나와, 제7연대(장, 대좌 김창봉)와 제9연대(장, 대좌 김만익)을 좌우 일선에 두고 제8연대(장, 중좌 김병종)을 예비로 보유하였으며 동사단의 포병연대(장, 대좌 안백성)는 유정리(楡亭里) 부근에서 지원태세를 갖추었다.
--></ref>
== 포천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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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연대의 영내 대기 ===
다행히도 제9연대의 전 장병이 영내대기 상태에 있었으니, 이는 연대장 윤춘근 중령이 전날 사단으로부터 “재량에 따라 주말외출을 실시토록 하라”는 통보를 받고, 오랫동안의 긴장 속에서 대기한 바 있는 병사들에게 외출과 외박을 허용할까 생각하다가 당면의 적정이 수상한 까닭으로 영내에서 휴무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그는 뒤에 당시를 회고하며 술회하기를, “오랜만의 외출이라 처음에는, 38선의 경비를 담당하는 제2대대만 제외하고 모두 허용하려고 하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적정이 심상치 않았다. 일주일 전부터 [[철원]]에 기갑부대가 나타났다는 첩보가 있는가 하면 북한의 정규군이 38경비대와 교대하였다는 소문이 떠돌고, 6월 23일 밤에는 제2대대장으로부터 [[영북면]] 운천리에서 차량대열이 [[유정리]]로 이동한다는 보고에 이어 바로 [[영평천]] 부근에 전차가 나타났다고 속보되는 등, 모든 면에서 평상시와 달랐다. 그래서 제 1, 3 양 대대의 병사들의 외출준비를 마쳤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일단 중지시키고 이상이 없으면 6월 25일 주간에 시행토록 하자고 하였더니 대대장들도 내 뜻에 따라 모두 영내에 남았으며 나도 감기로 미열이 있었지만 [[청량리]] 숙소에 전화연락만을 하고 영내에서 대기하였다”고 하니, 일선 지휘관의 심회를 헤아리고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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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왼쪽 제1선인 제6중대는 [[성일영]] 소위가 지휘하는 제 3소대가 [[추동리]]에서 한차례 고전을 벌인데 이어, 가양리 장자동으로 집결한 중대의 주력이 그 서남쪽 삼차로를 막아 287고지에 연한 방어진지를 급편 하였는데, 여기에서도 또한 지방도 제325호선(가영로)을 따라 침공한 전차대의 강습으로 말미암아 대동소이한 양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북한군의 전차대가 그 남쪽 2km의 장승거리 삼거리를 넘어서자 제6중대는 분산병력을 수습하여 [[무이산]](포천읍 북쪽 7km7&nbsp;km)쪽으로 전진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대대본부와 통신이 두절되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로 [[신북면 (포천시)|신북면]] 삼성당리 계곡을 따라 포천읍 쪽으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제7, 6 양 중대가 고전을 치르고 있을 무렵에 38선에서 12km12&nbsp;km 후방인 포천읍에 위치한 대대본부에서는 대대장 전순기 소령이 일선의 위급한 전황을 제9연대장(윤춘근 중령)에게 보고함과 아울러 병력 증원과 특히 대전차 화기의 지원을 요청한 다음 제8중대장 박기순 중위를 대동하고 [[영중면]] 소재 만세교 초소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06:00에 여기에 도착한 대대장은 곧 예비인 제5중대로써 만세교 북측의 좌우측방의 160고지와 208고지에 연한 저지 진지를 급편하게 하여 연대의 주력이 진출할 때까지 지연전을 펴기로 하였는데, 이때에 북한군은 양문교를 넘어 만세교 쪽으로 지향하고 있었으니, [[호국로 (경기도)|43번 도로]]를 따라 주력으로써 침공하리라고 판단한 대대장의 예견은 적중하였으나, 소총만을 들고 능선을 지키는 병사로서는 이 기계화 부대를 감당키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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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진전 50m 까지 적을 유도한 동 중대(-)는 선두차를 명중시키고 함성을 지르며 기뻐하였으나 그것은 일순뿐으로 파괴된 줄 알았던 전차는 오히려 진지에 포격을 연발하며 계속 진전으로 육박하는 것이었다.
 
이에 좌측포가 다시 수 발을 더 명중시켰으나 아랑곳없이 목전에 당도하니, 겁난 병사들이 조준경만을 빼어들고 [[신북면 (포천시)|신북면]] [[신평리]](포천 북쪽 5km5&nbsp;km)쪽으로 급히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반면에 적은 위세를 돋우어 저지선을 돌파한 다음 다시 탄장선으로 침공하니, 이때가 09:40으로 만세교 부근의 지연전은 2시간을 채 지나지 못하였으며 제2대대 5중대의 장병들은 [[구릉]]에서 이를 방관하는 형상이 되고 말았다.
 
=== 북한군 기계화 부대의 선공 ===
북한군 제3사단은 이날 새벽에 38도 분계선을 돌파하여 10km10&nbsp;km 남쪽의 만세교 부근까지 돌입한 연후에 일단 멈추어 전열을 정비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10:30을 기하여 재공격에 나섰다.
 
이번에는 [[김창봉]] 대좌가 이끄는 제7연대로써 43번 도로를 따라 정면공격을 꾀하는 한편, [[김만익]] 대좌가 이끄는 제9연대를 서측의 지방도 제325호선(가영로-포천로)로 우회시켜 일격에 포천을 확보하고자 기도한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이들은 본도상에 공격의 중점을 두고 [[안백성]] 대좌가 이끄는 포병부대화력을 여기에 집중하는 동시에 기계화 부대를 선봉으로 삼아 연대 주저항선의 중앙지대를 돌관하여 장차 크게 공위코자 한 것으로 추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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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에는 이미 제9연대의 주저항선이 무너져 북한군의 보병부대가 탄장을 통과한지 1시간이 지나고 기계화 부대가 이보다 3시간 전에 포천에 돌입하였던 것이니, 이제 공격의 화살이 곧 목전에 다다른 급황 이었다.
그러나 사단장으로부터 탄장으로 직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3연대장 이상근 중령은 적정을 확인키 위하여 수색소대장 김철순 중위로 하여금 소대병력을 지휘하여 포천까지 위력정찰토록 지시하고 자신은 주위의 지형을 살피던 바, 15:30에 이르러 수색소대장으로부터 [[어룡동 (포천시)|어룡동]]부근에 북한군의 전차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입수되자 곧 주력을 반전시켜 3km3&nbsp;km 후방인 [[소흘읍|송우리]]에서 급편방어 태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송우교]]를 중심으로 좌우 측방에 각각 2개 중대씩 배치하는 한편 [[이봉근]] 중위가 지휘하는 혼성 제11중대로 하여금 [[호국로 (경기도)|43번 도로]]를 포함한 중앙지대를 담당케 하여 진지작업에 착수하였는데, 이때에 마침 제1대대장 [[임백진]] 소령이 현지에 당도하자, 그에게 동측의 2개 중대를 지휘케 하고 제3대대장 [[김붕상]] 소령은 제11중대를 포함한 서측의 3개 중대를 맡아, 양 대대로써 방어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연대장 이상근 중령은 장송우 북쪽의 134고지에 연대 관측소를 설정하여 제3대대장과 함께 그 고지로 올라가 본대를 장악하고, 57mm 대전차포 2문을 그 동측의 노변에 배치하였으며, 연대 통신대장 [[김성규]] 중위와 제1대대의 통신소대장 [[김덕수]] 소위는 통신망을 구성하는 등 대결 태세를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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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대가 소요산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제1연대는 제1대대(대대장 [[김봉룡]](金鳳龍) 대위)를 마차산에 투입하고 뒤를 이어 [[김황목]](金煌穆)이 이끄는 제3대대를 봉암리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제1대대가 마차산의 방어진지를 점령하였을 무렵에는 북한군이 이미 이 고지를 우회하여 [[전곡읍]] [[간파리]](干坡里)방향으로 남하 중에 있었다. 따라서 제1대대는 마차산 정상에서 소요산의 교전상황을 구경하는 처지가 되었으나 대대를 지휘하던 [[김봉룡]](金鳳龍) 대위는 상황변화에 따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다만 연대에서 어떠한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제3대대에 배치된 봉암리에도 북한군이 출현하지 않았으므로 제1연대는 그와 같은 긴박한 상황 하에서 2개 대대를 유휴병력으로 대기시킨 채 시간만 허송한 결과가 되었다.
 
한편 제1연대를 직접 지원하던 제5야전포병대대 제2중대는 주저항선 남쪽 [[보산동 (동두천시)|보산리]](保山里) 부근에 준비된 진지를 점령한 지 얼마 후에, 밀집대형으로 남하하는 북한군의 1개 대대를 집중포격하여 대부분을 격멸하는 수훈을 세웠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 패주했던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을 재개하였다. 이때 제1연대 57mm 전차포 중대장은 창말고개(동두천 북쪽 2km2&nbsp;km 지점)에서 선두 전차 2대의 측면을 사격하여 모두 파괴하였고 이에 당황한 북한군은 다시 초성리 쪽으로 철수해 버렸다. 이러한 승리의 쾌보가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거쳐 방송되는 과정에서 국군의 반격이 개시되었다고 비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제1연대는 탄약이 떨어져 재보급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으나 보급사정이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편 북한군 제4사단은 이날 15시를 전후하여 제107전차연대를 선봉에 내세우고 [[동두천]]을 맹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맞선 제2대대는 10시간 동안이나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였으나 마침내 [[동두천]]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한국군의 주저항선을 돌파한 여세를 몰아 일몰과 더불어 동두천 시내로 진입하였고 한국군 제1연대 제2대대는 어둠 속에서 시가전을 펼쳤으나 역부족하여 양주 [[회천동 (양주시)|덕정리]]로 철수하여 집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마차산]]의 제1대대는 유 · 무선 통신의 두절로 철수명령이 전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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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참모장 [[채병덕]]은 26시 01시, 제7사단은 동두천 방면으로, 새로 투입된 제2사단은 포천 방면으로 진격하여 각각 전날 북한군에 빼앗긴 이곳들을 탈환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대해서 제2사단장 등은 무모한 작전이라고 반발하기도 하였다. 명령에 따라, 제7사단은 전날 동두천에서 패퇴한 제1연대에게 동두천을 공격토록 하고, 새로 배속된 제18연대는 동두천을 서쪽으로 우회하여 [[양주군]] [[남면 (양주시)|남면]] 신산리로 반격을 개시하였다(8시). 이때, 동두천에 주둔한 북한군 제4사단은 의정부 전면공격을 피하고, 서쪽으로 우회한 은현로 방면으로 내려오려 하였으므로, 1연대는 동두천 읍내와 북쪽 5km의 소요산까지 진출한 반면, 18연대는 우회하던 북한군 제4사단과 조우하였고, 북한군은 동두천 남쪽 7km의 덕정의 좌우측을 협공하였다. 이로써 1연대는 퇴로가 차단되어 병력이 분산되어 버렸다. <!--요약문 작성 미완료-->
=== 반격 준비 ===
본부가 대전에 소재하고 있던 [[대한민국 2보병사단|제2사단]](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개전 당일 내려진 명령에 따라, 우선 가용병력인 1개 대대를 이끌고 25일 밤에 의정부로 당도해 있었다.<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56쪽. <!-- 먼저 제2사단의 경우를 보면, 사단장 이형근 준장이 이날 08.00에 대전에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백일(金白一) 대령으로부터 『지금 적이 전면남침하고 있으니 병력을 끌고 빨리 올라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당장 가용병력은 대전 비행장을 경비중인 1개 대대 밖에 없었다. ...--></ref> 나머지 병력들은 26일에 올라올 예정이었다.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은 [[대한민국 7보병사단|제7사단]] 사령부(사단장 [[유재흥]] 준장)를 2회 시찰하였다. 제7사단은 전날에 과반수의 병력을 손실한데다 잔병이 분산상태에 있고, 제2사단은 당장 가용병력이 1개 대대 밖에 없으니 병력과 장비의 우열도 문제이지만 보다 화급한 요건은 후방의 예비사단이 현지에 진출하여 전투전개를 할 수 있는 시간 문제였다. 그리하여 그는 시찰 후, 재경(在京)부대를 의정부지역에 우선적으로 투입하는 동시에 후방 3개 사단을 서울로 이동시키도록 조치하였다. 6월 26일 01:00에 7사단 사령부를 다시 시찰한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의정부를 고수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반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제2사단장 [[이형근]] 등 군 지도층의 일각에서는, 반격작전을 전개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 병력을 축차로 투입하느니 보다 주력이 도착한 후에 전투력을 집중 운용해야 한다는 것, 북상중인 예비사단(제2사단 등)을 한강 남안으로 집결시켜 방어가 유리한 한강선 방어진을 구축함과 아울러 일선 분산병력을 수습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러나 채병덕 등 수뇌부는 정치적인 의의와 심리적 영향을 배려한 전략면에서 수도 서울의 포기는 있을 수 없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채총장은 무조건 반격으로 전환하라고 엄명하고 북한군 전차는 육탄공격으로 파괴하라고 강조하였다. <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58쪽. <!--“... 이때 제7사단은 과반수의 병력을 손실한데다 잔병이 분산상태에 있고, 제2사단은 당장 가용병력이 1개 대대 밖에 없으니 병력과 장비의 우열도 문제이지만 보다 화급한 요건은 후방의 예비사단이 현지에 진출하여 전투전개를 할 수 있는 시간 문제였다. 따라서 군 지도층의 일각에서 『병력을 축차로 투입하느니 보다 북상중인 예비사단을 한강 남안으로 집결시켜 한강선 방어진을 구축함과 아울러 일선 분산병력을 수습하는 것이 可하다.』는 강력한 주장이 있는가 하면, 수뇌부에서는 『정치적인 의의와 심리적 영향을 배려한 전략면에서 수도 서울의 포기는 있을 수 없다.』고 이에 대하여 부동의하기도 하였다.”--></ref><ref>이형근은 이 명령에 따를 수 없어서 해임되었다고 회고하고 있으나, 다른 기록들과 맞지 않는다. : {{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62500209203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6-25&officeId=00020&pageNo=3&printNo=16533&publishType=00020 |제목=6ㆍ25를 회고한다-이형근 |출판사 =동아일보 |작성일자날짜 =1975-6-25|인용문=<!-- “그런 상태에서도 채병덕 참모총장은 「의정부를 사수하라. 부대가 도착하는 대로 전선에 투입, 전적차대를 부수고 반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려요. 당시 상황은 반격전을 펼 수 없었어요. 그것보다는 우선 전선을 정비, 각 부대를 우리에게 유리한 장소로 집결시켜 반격준비를 해야 할 형편이었죠. 그렇게 해도 어려운 전세였는데 부대가 도착하는대로 무작정 투입시켜 반격하라고 하니 이는 「작전」이 아니었어요…이 준장 등 몇몇 지휘관들은 후방부대는 한강 이남에 집결, 한강을 제2의 방어선으로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채총장은 계속 무조건 반격만 명령, 의견이 맞섰다. 채총장=대통령의 명령이니 부대가 도착하는대로 오늘밤에 전선에 투입 반격하라. 이사단장=성공할 수도 없는데 불필요한 희생만 시킬 수 없다. 채총장=명령대로 안하면 군법회의에 넘기겠다. 이사단장=해임시켜 달라. 명령을 빙자해서 사단병력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 결국 이 장군은 제2사단장에서 해임되고--> }} </ref> 이에 따라 6월 26일 아침부터, 전날 의정부로 후퇴한 제7사단은 [[동두천]]을 목표로 반격을 감행하게 되었으며, 제2사단은 [[축석령]]을 경유하여 [[포천]]을 목표로 반격하였다. 결국, 6월 25일~26일 사이에 의정부 지구에 투입된 증원부대는 1개 경찰대대를 포함해 총 15개 대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부대들은 건제를 고려하지 않고 축차적으로 투입되었다. 더욱이 탄약을 위시한 각종 보급지원이 뒤따르지 못했으며, 유 · 무선통신망이 구성되지 않아 횡적 연락과 협조는 고사하고 상하급 제대간에도 통신이 소통되지 않아 전투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 동두천 탈환 실패 ===
제7사단은 전날 [[포천 전투]]에 투입되었던 제9연대(연대장 [[윤춘근]] 중령) 및 제3연대(연대장 [[이상근 (1922년)|이상근]] 중령)가 분산되었으므로 가용병력은 제1연대(연대장 [[함준호]] 대령) 예하 제2 · 3대대(제2대대는 전날 [[동두천 전투]]를 치르고 덕정리로 후퇴하였었고, 제3대대는 봉암리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북한군과 조우하지 않았었다. [[마차산]]의 제1대대는 유 · 무선 통신의 두절로 철수명령이 전달되지 않았었다.)와 제3연대 제2대대(제1대대 및 제3대대는 [[포천 전투]] 이후 크게 흩어져 버렸다.) 및 전날 제7사단에 새로 배속된 제18연대(연대장 [[임충식 (1922년)|임충식]] 중령) 예하 2개 대대(제2 ·3대대)를 합쳐 모두 5개 대대였지만, 실제 병력은 증강된 1개 연대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제7사단은 제1연대로 하여금 의정부에서 곧장 동두천으로 뻗은 [[평화로 (국도 제3호선)|평화로]]를 따라 동두천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배속된 제18연대는 동두천에서 서쪽으로 7km7&nbsp;km 우회하여, [[양주군]] [[남면 (양주시)|남면]] 신산리를 공격토록 하였다. 한국군 제7사단은 수색정찰이나 관측을 통한 적정수집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적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이 무렵 제7사단과 대치한 북한군 제4사단(사단장 [[이권무]] 소장)은 동두천에서 공격을 위한 재편성을 완료하고 공격개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북한군 또한 한국군의 반격과 거의 같은 시각에 의정부를 탈취하기 위한 공격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은 한국군이 [[국도 제3호선]] [[평화로 (국도 제3호선)|평화로]]를 강력히 방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동두천]]~[[덕정리]]~[[의정부]]로 이어진 [[국도 제3호선]]을 피하여 그 서쪽으로 5km5&nbsp;km 우회한 [[봉암리]]~[[덕정리]] 간 [[은현로]]·[[화합로 (경기도)|화합로]]에 주공(主攻)을 투입하여 기습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한국군의 주공(主攻)인 우일선의 제1연대는 6월 26일 08:00시에 반격을 개시하여, 적의 저항이 전혀 없는 가운데 [[평화로 (국도 제3호선)|평화로]]를 따라 [[동두천]]읍내와 그곳부터 북쪽으로 5km5&nbsp;km 나아가 [[소요산]]까지 진출하였다. 조공(助攻)인 제18연대는 제1연대보다 2시간이 늦은 6월 26일 10시에 반격을 개시하여 서북진하다가,<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64~365쪽. <!-- 제18연대 (장, 任忠植 중령)는 이날 반격에서 사단의 좌일선을 맡아 鳳岩里를 탈취키로 하였는데,... 이윽고 10.00를 기하여 공격에 나섰는데, 張春權 소령이 지휘하는 제2대대를 선봉으로 삼아 316번 도로를 따라 봉암리의 직남방으로 진격케 하고, 安玟一 소령이 지휘하는 제3대대를 후속케 하여 防築골(龍岩里 서쪽 마을) 삼거리에 당도하는 즉시로 그 서쪽의 湘水里-笠岩里로 돌아 측방에서 협공코록 조치한 가운데 一路 서북진하였다.--></ref> 이날 12시경에 [[화합로 (경기도)|화합로]]변의 은현초등학교 부근을 지날 무렵, 방어로 전환할 것을 명령받았는데, 이는 적의 계속적인 압력으로 의정부가 위협받게 되자 사단장이 취한 조치였다.<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65쪽. <!-- 그리하여 특기할만한 상황이 없이 계속 진출한 연대(―)는 12.00에 이르러 그 선두가 은현초등학교(덕정 서북쪽 4km) 부근을 지나게 되었는데 돌연 사단장 유재흥 준장으로부터 『현지에서 방어태세로 전환하라.』는 긴급명령이 하달되었다. 이 명령은 무전교신으로 연대장이 직접 수령하였거니와 이렇듯 돌연한 연대의 임무전환은, 이날 10.00에 제1연대가 동두천을 탈취하였으나 공실로 化하여 적의 행방을 알 수 없는데다, 우익인 제2사단이 축석령에서 고전을 치른 끝에 그 본부인 금오리가 파탄지경에 이르러 의정부가 위기에 빠짐으로써 취하여졌던 것이니, 이제 공격보다도 의정부의 防守가 더욱 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ref> 이에 따라, 제18연대는 용암리 도락산 북쪽 기슭의 감제고지에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중(13시)<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65쪽. <!-- 이에 연대장 임충식 중령은 곧 방어태세로 전환하여, 선봉인 제2대대로 하여금 현위치에서 龍岩里―△157간에 진지를 급편케 하고, 제3대대는 그 西端에 連하여 杏亭(德亭 서쪽 5km)까지 이르는 道下里 일대에 병력을 배치토록 하였다. 이리하여 대체로 13.00까지 진지를 점령하였는데, 제2대대는 제6중대(장, 金珽雲 중위)와 제7중대(장, 李圭大 중위)를 좌우 제1선으로 삼아 정동 돌출능선의 양록에 진지를 마련하고, 제3대대는 제10중대(장, 金鳳俊 대위)와 제11중대(장, 元治南 중위)를 제1선에 내세워 道下里 일대를 막아서니, 이로써 연대(―)는 道樂山(△440) 북록에 새로운 진지를 편성케 된 셈이었다. --></ref> 적의 기갑부대가 [[화합로 (경기도)|화합로]]를 따라 [[덕정]]으로 접근 중이었으나 연대는 북한군을 그냥 통과시켰다. 이는 엄청난 전투력의 전차를 직시한 [[임충식 (1922년)|임충식]] 연대장이 무모한 대결을 회피하고 후속하는 적 보병과의 일전에 대비하여 아군의 배치상태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봉암리]] 부근에서 강력한 북한군과 조우하여 분산되고 말았다. <!--은현초등학교 진지 구축과 봉암리에서의 북한군 조우의 시간 순서가 애매함. -->그 얼마 후에 북한군이 동두천에서 남쪽으로 7km의 [[덕정]]을 좌우측에서 협공하였으므로 제7사단은 부득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7사단이 반격을 전개한 자체가 무모한 작전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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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석령 후퇴와 의정부 함락 ===
 
26일 01.00에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으로부터 반격명령을 받은 제2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금오리]]의 지휘소로 돌아와, 북상 중인 사단의 주력(제5, 제16, 제25연대)이 따라 올라오기를 고대하면서 우선 제5연대의 제2대대장 차갑준 소령에게 총참모장의 명령대로 [[축석령]] 북쪽에 있는 적의 전차를 기습하여 파괴토록 지시하였는데, 이것은 반격이라기 보다는 대전차 특수임무부대와 같은 성질의 것이었다.<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68쪽. <!-- ...이날(26일) 01.00에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으로부터 반격명령을 받은 제2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금오리의 지휘소로 돌아와, 북상기동중인 사단의 주력(제5, 제16, 제25연대)이 추급하기를 고대하면서 우선 제5연대의 제2대대장 차갑준 소령에게 총참모장의 명령대로 축석령 북쪽에 있는 적의 전차를 기습하여파괴토록 지시하였는데, 이것은 반격이라기 보다는 대전차 특수임무부대와 같은 성질의 것이었다. --></ref> 이리하여 26일 03:00, 제5연대 제2대대는 반격을 개시하였다.
 
2개 대대병력으로는 포천탈환이 어려우므로 축석령을 방어하고 있을 제3연대를 초월 공격하겠다는 것이 사단장의 작전구상이었으나 이는 너무 성급한 반격이었다. 이 무렵 제 3연대는 이미 분산되었는데<ref>제3연대(연대장 [[이상근 (1922년)|이상근]] 중령. 그는 [[이형근]] 준장의 친동생이다.)는 25일 포천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패전하여 흩어져 버린 것이다. </ref> 제 2·7사단장은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작전구상을 함으로써 제 2사단의 반격작전은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작전이 되고 말았다. <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68쪽. <!-- 더구나 축석령에 가면 제3연대(-)가 배치되어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으나 이때에 동연대는 이미 이곳을 철수하여 금오리 남쪽에 집결중이었으니, 이 공격은 벌써 계획수립 단계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ref>
 
사단 참모장 [[최창언]] 중령이 이끄는 제5연대는 제2대대를 선발대로 먼저 축석령으로 진출시켰으나 제3연대는 그곳에 없었다. 이윽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 전차의 굉음이 들리더니 북한군 기갑부대가 [[차갑준]]이 이끄는 제2대대 진전에 나타났다. <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68쪽. <!-- 그러나 사전정찰에 의한 치밀한 계획을 마련치 못한 대대는 아무런 적정을 모르고 一路 축석령을 오르던 바, 그 선두가 본자원[현 자원동] 북쪽 300m까지 진출하였을 때 적의 전차가 먼저 이 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ref> 이에 제5연대 제2대대 장병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히 싸웠으나 교전한 지 10분도 못 되어 탄약이 떨어지고 투지마저 꺾여 분산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2대대장은 병력의 일부를 수습하여 태릉으로 철수하고 나머지 병력은 분산되어 한강 남쪽의 낙오자 수집소에 집결하게 되었다. 08시에 이르러, 제5연대 제1대대(대대장 이정도(李貞道) 소령)가 증원부대로 본자일(本自逸)쪽으로 달려왔다. 이 대대 또한 제2대대와 마찬가지로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한 채로 “[[자일동]](自逸洞)에 가면 탄약차가 있을 것이다.”는 통보만을 받고 진출하다가 여기에서 전차대와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제1대대는 고갯마루에 도착하기도 전에 적과 싸워보지도 못한 채 퇴계원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69쪽. <!-- 어느덧 08.00에 이르러, 李貞道 소령이 이끄는 제5연대의 제1대대가 증원코자 본자일(本自逸)쪽으로 달려왔다. ... 이 대대도 또한 제2대대와 마찬가지로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한 채로 『自逸洞에 가면 탄약차가 있을 것이다.』는 통보만을 받고 진출하다가 여기에서 전차대와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ref>
 
이렇게 제2사단은 북한군을 저지하는 데에도 급급한 지경이 되자 [[문용채]]가 이끄는 제16연대(25일 [[청주]]를 떠나 26일 04:00에야 창동에 도착하였다.)를 상금오동 부근의 감제고지에 배치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로부터 약 1시간 후에 전차 20여 대를 앞세운 북한군이 공격을 재개하자 국군은 전차를 파괴할 수단이 없어 전전긍긍하였다.
 
다만 [[김진동]] 대위가 지휘하는 제16연대 1대대 특공대가 2.36인치 로켓포의 기습적인 집중포격으로 선두 전차 1대를 배수로에 빠지게 함으로써 잠시 동안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켰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제16연대의 2개 대대는 북한군 보병부대와 한차례의 교전을 치른 후에 [[공릉동|태릉]]과 [[호원동]]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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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들 전차와 격전을 치른 제16연대 2대대는 많은 피해를 입고 분산되었고 이날 밤 백석교 우측에 배치된 제25연대 11중대장 [[문일수]] 중위는 전차 특공대를 편성, 지휘하여 노상에 정지 중이던 북한군의 전차 4대를 습격하여 그 중 2대를 파괴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다음날 6월 27일 새벽 북한군이 공격을 재개하자 제25연대는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탄약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태릉]], [[능곡]], [[수원]] 등지로 분산 철수하였다.
 
한편 육군사관학교장 [[이준식 (1900년)|이준식]] 준장은 6월 25일 13:00시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생도대대와 배속된 전투경찰대대를 391번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내촌 부근의 감제고지에 배치하였다.
 
다음날 국군은 남하하는 북한군과 격전을 치른 후 [[태릉]]으로 철수하여 제9연대(25일, [[포천 전투]]에서 패하여 분산되면서 제1대대는 태릉 방면으로 이동하였었다.)와 더불어 [[불암산]]~[[태릉]]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미아리]]~[[태릉]] 방어선의 우측 일각을 담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