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신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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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Hwangseong sinmun.jpg|thumb|250px|right|《황성신문》 창간호]]
 
'''황성신문'''(皇城新聞)은 [[남궁억]], [[나수연]] 등이 중심이 되어 [[1898년]]([[광무 (연호)|광무]](光武) 2년) [[9월 5일]]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받아 창간한 일간 [[신문]]이다. 주필로는 [[유근]],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이 활동하였다. 민간자본 신문이었으며, 국한문혼용체가 쓰였으며, 애국적 논조로 일관했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현대 문학/현대 전기 문학/개화기와 신문학의 태동#황성신문(皇城新聞)|황성신문(皇城新聞)]]〉</ref> [[1905년]] [[을사조약]]에 대한 [[장지연]]의 반일 사설 〈[[시일야방성대곡]]〉 기사로 인해 정간당했고, 다시 [[1906년]] 복간되었다.<ref>일본 제국의 압력으로 장지연의 복귀는 불가했다.</ref> [[1910년]] [[일제강점기]] 때에 신문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바뀌었으며, [[9월 14일]] 제3470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황성신문이 발행된 13년간 평균 발행부수는 3000부 가량이었다고 한다.<ref>Andre Schmid. 2002. Korea Between Empires, 1895-1919.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p.51.</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