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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장각의 본진과 싸우던 노식은 연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좌풍(左豊)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벼슬에서 쫓겨났으며, 그 뒤를 이은 [[동탁]](董卓)은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황보숭은 조정의 명령에 의해 동탁을 대신하여 장각의 본진을 상대하게 되었다.
 
10월에 황건적 진영을 야습하여 3만 명을 베고 장각의 동생인 [[장량 (후한)|장량]](張梁)을 죽였다. 승리 후 장각이 이미 죽었다는 걸 알고 장각의 관을 찾아내어 부순 뒤 관에서 장각의 시체를 꺼내서 그시체의 목을 베어 [[뤄양|낙양]]으로 보냈다. 황보숭은 계속 추격하여 11월에는 하곡양(下曲陽)에서 [[장보 (후한)|장보]](張寶)를 죽이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공으로 기주목 겸 좌거기장군(左車騎將軍)이 되었으며, 괴리후(槐里侯)로 봉해지고 식읍 8천 호를 받았다.<ref>皇甫嵩朱儁 열전</ref>
그러나 황건적 토벌 중 [[장양 (후한)|장양]](張讓)의 뇌물 요구를 거절하고 [[조충 (후한)|조충]](趙忠)이 법을 어긴 큰 집을 지은 것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185년]] 둘의 모함을 받아 좌거기장군 벼슬을 박탈당하고 식읍 6천 호가 깎였다.
 
==변장ㆍ한수의 난 진압==
 
양주(涼州)에서는 [[184년]]에 [[변장]](邊章)과 [[한수 (후한)|한수]](韓遂)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몇 해가 흐르도록 진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188년]] 11월 한수와 [[마등]](馬騰)이 주군으로 추대한 왕국(王國)이 진창(陳倉)을 포위하자, 조정에서는 황보숭과 동탁에게 4만 군사를 주고 이들을 토벌하도록 했다. 계급은 황보숭과 동탁이 동일했으나 황보숭이 주장(主將)이고 동탁이 부장(副將)으로 동탁은 황보숭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를 동탁은 엄청난 치욕으로 생각했다.
 
이때 황보숭은 동탁과 의견이 맞지 않았다. 동탁은 처음 토벌 명령을 받았을 때 진창을 구원해야 한다고 했으나, 황보숭은 진창을 공격하다 힘이 빠진 적군을 치려 했다. [[189년]] 2월에 왕국이 회군하려 할 때 황보숭이 이들을 공격하려 하자, 동탁은 궁지에 몰린 적을 치는 것이 옳지 않다며 반대했다. 결국 동탁을 후방에 남겨둔 채 반란군을 공격하여 만여 명을 베고 그 공으로 큰 상을 받자베자, 동탁은 황보숭을 원망하여 둘의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한편 한수는 패하고 돌아온 왕국을 죽였으며, 이후 반란군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면서 반란군은 무너지게 되었다.
 
==동탁 집권기==
동탁은 영제가 중앙 관직으로 불러들여도 가지 않았으며, 휘하 병력들을 황보숭에게 넘기라는 명령도 따르지 않았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황보숭의 조카 황보력(皇甫酈)은 동탁을 제거할 것을 제안했으나, 황보숭은 조정의 명령 없이 죽일 수 없다면서 조정에 보고만 했다. 조정에서는 동탁을 책망했으나, 동탁은 이 역시 무시하고 군사를 거느린 채 주둔하다가 [[하진]](何進)이 [[십상시]]를 제거하기 위해 낙양으로 불러들이자 낙양으로 가서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190년]] 동탁은 황보숭을 성문교위(城門校尉)로 임명한다는 구실로 조정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했다. 황보숭의 장사(長史)인 양연(梁衍)은 동탁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으며, 당시 경조윤(京兆尹)이었던 [[갑훈]](蓋勳)도 동탁을 토벌하자 했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낙양으로 갔다. 이 때 과거의 치욕<ref>동탁이 같은 계급으로 황보숭의 부하가 된 적이 있었다.</ref>에 연연하는 동탁이 황보숭에게 온갖 죄를 뒤집어씌워서 죽이려 했다. 그러나 황보숭의 아들이고 동탁과의 사이가 친형제같았던 황보견수(皇甫堅壽)가 눈물로 호소한 것이 동탁의 마음을 움직여 그대로 조정에서 일하게 되었다.
 
동탁이 [[192년]] [[왕윤]](王允)과 [[여포]](呂布)에게 살해당한 후 거기장군과 태상(太常) 등을 지냈다. 그러나 왕윤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이각 (후한)|이각]](李傕)이 전횡을 일삼는 기간에 병이 들어 죽었다.